《푸른 종소리Blue Peal of Bells》의 잔향들, 부산현대미술관, 2021

《푸른 종소리(Blue Peal of Bells)》

2020.12.11 – 2021.03.21.
부산현대미술관 전시실 3‧5, Gallery 3‧5(지하1층)
안젤리카 메시티, 예스퍼 유스트, 삼손 영, 최대진, 라그나르 캬르탄슨 & 더 내셔널, 장민승 + 정재일




《푸른 종소리Blue Peal of Bells》의 잔향들

“종소리는 문화와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적 단층선에 따라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를 분리해주는 영토를 정의합니다. 또한 종소리는 개개인을 연결합니다.”

삼손 영은 종소리에 관한 글에서 앨런 코빈의 『마을의 종소리』 속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연구는 종소리가 어떻게 한 공동체의 청각적 상징물이 되었는지, 어떻게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투쟁을 반영해왔는지, 어째서 종이 대포알과 동전으로 바뀌었는지, 언제부터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는지, 그리고 그 잃어버린 상징과 실제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다룬다. 종은 ‘청각적 공동체’의 단단한 실체였던 것처럼 보인다. 

(…)

신호들

“·- ·–· ·–· · ·-·· / ·- / – — ··- ··· ·-·-·-”

이 짧은 리듬은 프랑스 해군이 모스 부호 통신의 공식 종료를 알리며 송출한 마지막 메시지의 일부다. 안젤리카 메시티는 송출된 지 20년도 더 지난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 이것은 영원한 침묵에 앞선 우리의 마지막 함성”이라는 메시지를 되살려 조각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과 3채널 비디오 〈릴레이 리그〉를 만든다. 

순간과 지속의 교차로 이루어진 모스 부호는 조각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으로 형상화되고, 이는 조각의 그림자를 시작으로 다른 매체로 하나둘씩 옮겨간다. 드러머는 이 모스 부호의 리듬을 변주하여 연주를 시작하고, 안무가는 그 연주에 반응하며 움직인다. 바닥에 앉은 두 사람은 안무가의 몸짓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손짓으로나마 그 운동을 곰곰이 뒤따라간다. 수많은 전쟁의 메시지를 송수신했던 매체의 종말을 알리기에는 짧기 그지없었던 이 무정한 신호를, 음악가와 안무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그 종결을 연장한다. 

(…)

소거된 음악 

삼손 영의 〈음소거된 상황 #22: 음소거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일견 단순하다. 그는 악기를 최대한의 방식으로 뮤트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음향 효과를 내기 위해 약음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과 활 사이에 종이를 끼워 넣고, 관악기에 펑퍼짐한 숨만을 불어 넣으며 음의 발생을 최소화한다. 그 상태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한다. 그리고 녹음된 소리를 다시 공간에 12채널로 펼쳐놓는다. 이때 우리가 듣게 되는 건 음표 바깥의 소리다. 

남은 것은 활을 긋는 소리, 공기를 불어 넣는 소리, 음악가들의 숨소리, 그리고 그 잔향이다. ‘음악’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은 소거되어야 할 불순한 노이즈지만, ‘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들은 유일한 감상 대상이 된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악기라는 몸체, 그리고 음악가의 신체를 비로소 낱낱이 바라본다.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을 잡음과 그 주범이었던 몸체의 소리, 그리고 순수한 상태로 들려야 할 ‘악음’. 〈음소거된 상황 #22: 음소거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은 그 관계를 위상반전한다. 

음악 애호가들로 추측되는 이 오케스트라단은 한 몸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단 사이에 형성되어 있어야 할 끈끈한 음악적 유대감도 별로 없어 보인다. 숱한 리허설을 거쳐 합의되었어야 할 현악기 보잉은 아직 철저히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음악에 대한 몰입도도 각기 다르다. 이 오케스트라단은 조금 더 ‘개개인들’처럼 보인다. 이 상황에서 부각되는 것은 잡음이라 치부됐던 몸의 소리들, 그리고 개개인의 소리와 움직임이다. 매끈한 조화를 만들기 위해 오케스트라라는 공동체가 어떤 잡음을 필터링해왔는지를 되돌아본다. 어쩌면 이 소거된 상황에서 드러나는 비통일성과 어수선함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공동체의 성질처럼 보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