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시간, 고래의 시간, 곤충의 시간, 오피니언 [숨] 칼럼 연재, 『경향신문』, 2020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왔다.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는 와중에 불가피하게 밖에 나갈 때면 꽃과 나무를, 새와 고양이를, 매일같이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을 눈여겨보곤 한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세계는 여전히 생동한다. 코로나19가 인수공통감염병이기 때문일까. 비인간과 인간, 자연과 사회라는 근대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중심적 시각을 반성하자고 말했던 사상가들의 의견을 곱씹게 된다.

수많은 일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소리와 음악의 영역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마침 최근에 한 동료와 탈인간중심적 시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음악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게 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바뀔지를 물었고, 동료는 소리를 어떤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로 이해해볼 수 있을지를 질문했다. 인간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이 질문들에 곧장 명쾌히 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대화의 목적은 상상적 사고를 통해서만 반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 아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었다.

유튜브에는 드뷔시의 음악을 듣는 코끼리, 누군가의 연주를 들으며 그르렁거리는 고양이처럼 동물이 음악을 듣는 영상들이 있다. 당장은 모종의 놀라움과 압도적인 귀여움에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되지만,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면 동물들은 저 소리를 정말로 어떻게 듣고 있을지 알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씩 피어오른다. 우리는 인간의 1년이 강아지의 1년과 같지 않고 인간이 듣는 소리와 새가 듣는 소리가 다를 것임을 안다. 이런 영상을 보면, 음악이 모든 주체가 사랑하는 소리가 아니라 몇몇 인간을 위한 제한적인 소리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지만, 적어도 인간이 호의를 바탕으로 다른 주체와 소통을 시도한다는 점만큼은 따듯하게 다가온다.

1996년, 프랑스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이는 ‘시간의 소용돌이’를 작곡했다. 끝없이 회전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음악에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악장별로 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1악장은 소위 일반적인 시간, 2악장은 팽창된 시간, 3악장은 수축된 시간을 다루는데 이는 마치 한 음악에 각각 인간의 눈, 현미경, 망원경으로 접근하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1악장은 환호성을 지르는 것처럼 빠르게 내달리지만 2악장에서 그 소리들은 형태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늘어지고, 3악장에서는 잔뜩 압축되어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리제이는 이 곡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더불어 사는 비인간 주체들을 이 상상의 세계에 초대한다. 1악장이 인간의 시간이라면 2악장은 고래의 시간, 3악장은 곤충 혹은 새의 시간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나는 이 음악을 다시 한번 각별한 마음으로 들으며, 이것을 서로 다른 주체의 시점에서 시간을 경험해보자는 제안으로 이해해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상상일 뿐이지만 내게는 의외의 질문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고, 믿는 줄도 모른 채 믿어왔던 인간 조건을 다시 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뜻깊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에 관한 논의가 “인간이 이 행성에 자신과 함께 출현한 무수히 많은 종과 더불어 시간, 신체, 공간의 그 모든 척도 속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볼 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호의와 우정에 기반한 공존을 고민하고, 최대한 타자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하는 몸짓들. 그런 작은 시도들을 음악의 주변에서도 발견하곤 한다.

원문: 경향신문 [숨]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022051015&code=990100&s_code=ao352#csidx0e1fd0cb5fce64093fa8b723a4619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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