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트리포노프, 쇼팽에 대한 오마주 Hommage à Chopin, Carnegie Hall,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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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 트리포노프, 쇼팽에 대한 오마주 Hommage à Chopin

Carnegie Hall – Stern Auditorium/Perelman Stage
2017년 10월 28일

첫 곡으로 몸포우를 선택한 건 꽤 좋은 선택이었다. 박수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 느긋한 쇼팽의 테마가 울려 퍼지는 순간 다른 그 어떤 감정보다도 쇼팽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에 휩싸였으니. ‘쇼팽에 대한 오마주Hommage à Chopin’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쇼팽에게 영감을 받은 작곡가들의 작품, 그리고 쇼팽의 곡을 고루 연주하는 이 리사이틀은 가장 먼저 애정어린 시선으로 쇼팽을 회고하며 시작했다.

트리포노프는 몸포우의 <쇼팽 변주곡>을 어떤 의미에서 꽤 공평하게 연주했다. 두 작곡가 사이의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곡. 쇼팽의 테마가 끝날 무렵 몸포우는 조금씩 자신의 음을 얹으며 쇼팽의 세계에 개입하고, 이어지는 변주들은 테마를 중심에 두고 쇼팽과 몸포우라는 두 축을 조금씩 오간다. 트리포노프는 어느 한 쪽에 쉽게 치우치지 않은 채 표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다. 변주들은 때로 마주르카처럼 들리기도, 카탈루냐의 정서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트리포노프는 억지로 특정한 민속적 색채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양식 이면에 녹아있는 작곡가의 가장 내밀한 정서에 가까워지려는 시도인 것처럼 들린다. 차분한 기조로 이어지던 연주는 말미에 이르러 이전 템포를 마구 앞지르지만, 그 몰아침이 의도된 것이기라도 했는지 곧 자연스럽게 잦아든다. 그 어떤 변주보다 느린 회상 조의 에필로그는 다시 한번 테마를 들려주는데, 트리포노프는 이 에필로그에서만큼은 쇼팽과 몸포우를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엮으며 곡을 마무리한다. 데크레셴도, 스모르잔도. 이렇게 느리고 고운 사라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쇼팽과 몸포우를 중재하는 듯한 이 묵직하면서도 매끄러운 연주는 곧장 트리포노프라는 이 청년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트리포노프는 대체 어떤 연주자인가. 엄청나게 활발한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다지 피로해 보이지 않는 이 피아니스트는 어쩐지 ‘젊은 거장’처럼 느껴진다. 젊은 연주자에게 흔히 기대할 법한 힘이 넘치는 연주나 믿을 수 없는 테크닉, 혹은 하나하나 공들여 세심히 깎아낸 음색 같은 음악의 한 ‘부분’이 트리포노프의 매력인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하나의 세계가 자신의 손으로 연주한 한 음으로부터 시작하고, 또 한 음으로 닫혀버린다는 걸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에 가깝다. ‘카네기홀 솔드아웃’이니 ‘떠오르는 스타 피아니스트’니 하지만, 그런 번쩍번쩍한 말은 왠지 트리포노프의 연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스펙터클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심해로 끝없이 가라앉으며 음악에 청중들을 가둬버린다면 모를까.

이어지는 짧은 호흡의 소품 네 곡. 트리포노프는 서로 다른 작곡가의 곡이라는 걸 명확히 들려주기보다는 소품집처럼 한 톤으로 매끄럽게 연주했다. 조성적 면에서도, 감정의 호흡 면에서도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슈만의 <카니발> 중 ‘쇼팽’은 이미 선명한 감정에 휩싸인 채 주저 없이 시작한다. 짧지만 감정이 몰아치는 이 곡의 연주에서는 특별히 트리포노프가 반복을 다루는 방식이 눈에 띈다. 다시 한번 등장하는 테마는 완전히 동일한 템포, 동일한 다이나믹으로 시작했으나 뒤로 이어질수록 조금씩 허물어진다. 반복이 시작될 때부터 다름을 분명히 선언하기보다는 작아지고 흐려지는, 또다시 천재적인 데크레셴도로 끝을 달리한다. 슈만 특유의 불안하고 여린 종지는 곧장 그리그의 <쇼팽에 대한 오마주>로, 바버의 <녹턴 Op.33>으로, 차이콥스키의 <Un poco di Chopin>으로 쉼 없이 이어진다. 바버의 녹턴은 가장 익숙하고 안전한 협화를 기대하게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바로 내어주지 않고 한 음씩 미끄러트린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곧 닿을 것 같은 협화’를 억지로 꺼내어 들려주거나, 불협화를 더 강조하는 식으로 연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트리포노프는 그 아슬아슬한 협화와 불협화 사이의 엷은 긴장감을 분명히 짚어낸다.

이제까지 계속해왔던 낭만음악 레퍼토리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트리포노프의 현대곡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트리프노프는 이를테면 음렬음악의 프레이즈를 낭만음악의 프레이즈처럼 연주하거나, 현대음악이 가진 풍성한 뉘앙스를 ‘현대음악’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무정하게 연주해버리는 것처럼, 음악에 특정 양식으로 체화된 주법을 덧붙이지 않는다. 불필요한 과장도 없다. 트리포노프는 음악을 그대로 직시한다. 그의 연주는 어떤 면에서 금세 듣는 이를 진심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거짓 없는 진솔한 말 같다.

평론가 김나희와의 인터뷰에서 거듭 언급한 “헝그리 앤드 앵그리” 상태(『예술이라는 은하에서』, 181-2)였던 것일까. 1부 마지막 순서였던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변주곡>에서 트리포노프는 회복 불가능한 비극적인 운명을 마주한 것처럼 절망적이면서도 어딘가 분노에 차 있다. 끝없이 건반으로 끌어내려지는 트리포노프의 손은 알레그로에서 라르로, 렌토에서 프레스토로 바삐 움직인다. 라흐마니노프의 <쇼팽 변주곡>은 총 열두 마디인 쇼팽 프렐류드 20번 중 앞의 8마디만 테마로 사용하면서도 이를 장난기 가득한 비르투오조적인 패시지부터 돌덩이처럼 무거운 슬픔까지 한껏 펼쳐놓았는데, 트리포노프는 성심을 기울이며 이 변덕스러운 무드를 하나하나 다 생생하게 끌어낸다.

공연의 하이라이트이자 이날 유일한 쇼팽의 작품이었던 <소나타 2번>은 꽤나 의도적으로 마지막 곡으로 배치된 듯했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들려주는 1주제를 지나 자조적이면서도 서정적인 2주제로, 그리고 다음 악장들로 요동치며 이어지는 연주. 연주의 1부에서 쇼팽에 ‘관한’ 작품들을 더 들었기 때문인지, 트리포노프가 만들어내는 쇼팽의 이미지는 한층 더 고유하고 섬세하게 들린다. 이 작품은 흔히 ‘장송 행진곡’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는 동명의 3악장 부제 때문이다. 최근 [Chopin Evocation]이라는 음반을 발매한 트리포노프는 같은 테마로 쇼팽 오마주 리사이틀을 세계 곳곳에서 열고 있다. (프로그램은 대부분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지만 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는 이 쇼팽 <소나타 2번>은 앨범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음반과 공연은 별개의 것이지만, 쇼팽의 ‘장송 행진곡’과 음반의 제목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게 된다. 기억의 환기 또는 영혼을 불러내는 것이라는 뜻의 ‘Evocation’. 다른 작곡가의 음악으로 재현된 쇼팽을 들려준 후에야 마지막에 ‘장송 행진곡’을 들려주는 이 프로그램은 청중들에게 쇼팽의 기억을 강렬하게 환기하는 동시에 어쩌면 쇼팽의 영혼에 바치는 추도사, 혹은 쇼팽을 불러내려는 강령술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쇼팽을 향한 그리움과 낙관, 유머, 절망이 뒤섞인 시선들, 쇼팽의 작고 깊은 세계를 빛내주는 반짝이는 장식음들, 그리고 장송 행진곡. 프로그램을 마치고, 한차례 커튼콜이 이어진 뒤 트리포노프는 아주 느리게 걸어 나왔다. 앙코르로는 쇼팽 첼로 소나타의 2악장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알프레드 코르토의 <라르고>를 연주했다. (다른 콘서트에서는 두 번째 앙코르곡으로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연주한 적도 있지만, 이날 연주는 코르토의 곡으로 마무리됐다.) 쇼팽과 그를 수호하는 몸포우, 슈만, 그리그, 바버,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들, 이 쟁쟁한 작곡가들의 음악에 휘둘리지 않고 트리포노프는 깊고도 예민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이제 쇼팽을 들을 때 트리포노프를 떠올리지 않기가 몹시 어려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