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서사로 이루어진 세계 — 홍성지의 〈프리즈마틱〉, 『한국창작음악 — 비평과 해석 사이 002 관현악: 사람과 세계의 창』, 모노폴리, 2019

빛의 서사로 이루어진 세계

이 음악들을 엮어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든다면, 신비와 알레고리가 가득한 무언의 서사시가 탄생하지 않을까. <세상의 빛>(Lux Mundi), <변용>(Transfiguration), <고통: 겟세마네의 기도>(Agonia), <축복받은 이: 예루살렘 입성>(Evlogimenos), <그리고 내려오심: 세례>(Et descendit), <나사로야 일어나라!>(Lazareveni foras!>, <올리워가시니: 승천>(Elevatus) 등, 이 곡들은 청자를 각기 다른 곳으로 인도하지만 다른 작품의 영역과 하나둘씩 느슨하게 연결되며 더 큰 서사로 이어지는 듯하다. 홍성지가 다루는 이 크고 작은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적으로 계량화된 현대적 시공간보다는 만물에 영이 깃들어있고, 신이 인간에게 신비를 속삭이던 아주 오래된 세계에 더 가까워 보인다. 

성화의 장면들

서양음악에서 종교는 음의 이름부터 형식과 기보법 등 여러 차원에 관여한 중대한 요인이다. 영국에 체류 중이던 2000년, 홍성지는 이 음악사에 뿌리내린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깊게 체감하며 그 역사의 시원에 위치한 사건들을 하나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원전과 기원후를 가르는, 서력의 출발점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은 14-16세기의 성화들을 통해서였다. 

이 성화들에 매료된 그는 2020년까지의 대략적인 작업 계획을 세운 뒤 그로부터 작곡을 해나갔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성화와 함께 기원 무렵의 이야기를 꾸준히 다루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 그는 음렬 중심의 곡부터 특수주법으로 구현한 독특한 음향이 주가 된 곡 등, 독주곡부터 합창, 대편성 합주곡에 이르는 그간의 작품을 이 큰 흐름 안에서 만들어왔다. 성화 속의 인물과 이야기와 그 메시지는 몹시 명시적이었지만 그가 이를 단순히 음악으로 옮기는 데만 주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의 구조나 비율, 색감 등 여러 요소들이 창작의 단초가 됐다. 이미지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로부터 창작의 가능성을 발견해서인지 그의 음악은 하비(Jonathan Harvey)나 피니시(Michael Finnisy), 퍼니호우(Brian Ferneyhough) 같은 작곡가에게 ‘음악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연상되는데 그건 굉장한 장점이니 잘 발전시켜라’ ‘음악에 초월적 측면이 있다’라는 평을 들었다. 작곡가들의 이런 발언은 여러 평론가가 그의 음악을 묘사할 때 빛이나 색채 등, 눈으로 감각할 수 있는 요소를 자주 사용한다는 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홍성지에게 이미지는 그저 출발점이었을 뿐, 곡을 전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은 순전히 음악적인 아이디어였다. 어떤 음형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악기 편성으로 구성할 것인가, 어떻게 반복할 것인가, 어떤 구조로 전개할 것인가 등 음악의 형식적 차원은 그가 깊게 천착하는 부분이었다. 정지된 이미지와 달리 음악은 시간 위에서 소리로 펼쳐내야 하는 만큼 그 시간을 구획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역행하지 않는 시간

‘빛이 있으라’는 언명과 함께 역행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간이 시작된 것처럼, 그의 음악은 결코 지나온 길로 회귀하지 않는다. 서양음악에서 수없이 반복됐던 A-B-A’라는 구조는 홍성지의 음악에서 쉬이 발견되지 않는다. “왕복 티켓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는 작곡가는 자신의 음악을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점진적 변화과정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반복’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A를 A’로 재현하는 거시적 반복은 지양하지만, A에서 B로 향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요인들을 계속 사용하며 변주하는 미시적 반복은 홍성지의 음악을 가득 메우고 있다.

(중략)

프리즘에 비추어 본 음악 —홍성지의 <프리즈마틱>(Prismatic for Piano and Orchestra, 2008)

바람처럼 빠르게 날아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시작된다. 빛이 프리즘을 거쳐 순식간에 풍성한 색채의 장으로 바뀌듯, 고음역에서 출발한 관악기의 얇은 소리는 차츰 사방으로 퍼져가며 다채로운 음색을 선보이는 오케스트라 투티로 이어진다. 곧이어 피아노가 등장하며 소리의 장은 묵직한 저음역까지 넓게 확장된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들려줄 수 있는 음역의 양 끝단을 오간 후, 음악은 시종일관 분주하게 움직인다.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빛과 그 색채를 음악으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빠른 템포여야만 했을 것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프리즈마틱>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현대음악시리즈 ‘아르스 노바’의 2008년 메시앙 시리즈에서 피아니스트 임수연과 서울시향이 초연한 작품이다. 편성은 피아노 협주곡과 같으나 이 음악이 협주곡 전통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약 15분간 연주되는 이 곡에서 피아니스트는 독주자적 역할을 맡기는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기교를 과시적으로 드러내거나 화려한 카덴차를 연주하지는 않는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일부로 사용된다. 

성화에 영감을 받은 그간의 작품과는 달리 <프리즈마틱>은 빛이라는 소재의 물성에 주목한다. 유럽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던 2000년대 초중반, 홍성지는 그림과 연관을 찾지 않는 쪽으로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더욱더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음악을 쓰고 싶다는 마음에 20년간 쓰리라 계획했던 성화 관련 작업에서도 잠시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 2006년, 그리스로 이주한 후에 그러한 생각을 이어가며 쓰기 시작한 곡들이 바로 <모놀리두스>(Monolithous), <루미너스 플럭스>(Luminous Flux), 그리고 <프리즈마틱>이었다. 상징적 의미를 암시하기보다는 곡의 근간이 되는 추상적 아이디어를 제목에 명시한 이 곡들은 음악의 짜임새나 음악이 그려내는 어떤 상태에 더 주목하게 만들었다. 

프리즘이 아니라 ‘프리즈마틱’이라는 형용사를 제목으로 내건 이 곡에서도 그러한 지점이 돋보인다. 이 제목은 빛의 움직임이나 색색깔의 빛이 비추는 장면 등, ‘현재진행형’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인상은 빠르게 내달리는 이 곡의 운동성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프리즈마틱>은 음렬에 기반해 쓰인 곡이나 이 곡에서 더욱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음 단위의 구성원리가 아니라 편성의 조합과 음역을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종횡무진 오가는 소리의 움직임이다. 소리는 높은 곳에서 맴돌다가 땅으로 뚝 떨어지듯 내려오고, 다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홍성지의 표현처럼 이 소리의 움직임은 “파도처럼 굽이치는” 형태를 띤다. 

이 유동적인 움직임이 비단 음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실처럼 얇은 소리를 내던 음들은 하나둘씩 쌓여 묵직한 소리 뭉텅이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무게를 덜어내고 얇은 텍스처로 바뀐다. 이 소리들이 얼마나 가볍게 날아다니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클라이맥스에서 오케스트라가 모노리스(monolith)라 불리는 거대한 석상처럼 묵직한 소리를 낼 때다. 단단한 돌이 별안간 지면에 꽂히는 것 같은 이 부분에서 <프리즈마틱>은 그 재빠른 운동성 대신 잠시 압도적인 장관을 선보인다. 작곡가는 이 곡이 말 그대로 빛과 색채에 관한 것이라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빛이 ‘다른 무엇인가를 뜻할 수도 있다’는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런 맥락에서 이 부분은 어떤 계시적 순간을 형상화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클라이맥스 이후, 소리의 몸체가 작아지고 피아노가 독주로 리드미컬한 음형을 연주하며 다시 앙상블을 시작해나가는데, 이 부분은 마치 빛의 반짝이는 잔상을 그려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차츰 템포를 가속하며 형형색색의 색채를 덧입히며 강렬한 진행을 이어가던 <프리즈마틱>은 어느 순간에 다른 곳으로 떠나가듯 끝난다. 

홍성지의 작품세계 전반을 돌아봤을 때 그간의 작업방향을 내려놓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프리즈마틱>은 다소 이례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작품에서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다뤄왔던 ‘빛’이라는 소재와 점진적으로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듯한 곡의 구조는 여전히 이 작품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프리즘이 투과된 빛의 색을 낱낱이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산란하는 빛의 소리를 들려주는 <프리즈마틱>은 홍성지의 작품들이 형성해온 견고한 세계를 풍성한 소리로 다시 풀어서 듣게 해주는 어떤 음악적 결정체였는지도 모른다.  

2019년 7월 13일, 북텍사스주립대학교 음악대학

신예슬: <프리즈마틱>과 더불어 여러 작품에서 ‘빛’을 암시하는 제목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선생님께 빛이라는 소재는 어떤 의미인가요? 

홍성지: 빛은 제가 2000년부터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특별한 주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빛, 볼 수 없는 빛 등 저는 빛을 여러 차원으로 이해하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항상 떠올리는 것은 ‘세상의 빛’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상징적인 빛입니다. 저는 음악으로 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물론 음악도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죠. 

한편 <프리즈마틱>은 빛을 프리즘에 투과시켰을 때 일곱 가지 색깔이 펼쳐지는 것을 생각하며 쓴 곡입니다. 이 곡에서는 빛의 상징적 측면보다 빛의 물성을 조금 더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사람들이 제 음악에 대해 말할 때 빛에 관련된 얘기도 많이 하지만 색채적이라는 얘기도 많이 하는데, 그 색채감은 작곡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과연 소리와 색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나 싶기도 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샤리노(Salvatore Sciarrino)나 도나토니(Franco Donatoni), 메시앙(Olivier Messiaen), 뒤티외(Henri Dutilleux) 같은 작곡가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신예슬: 제게 또 흥미롭게 다가왔던 점은 작품이 시간을 구조화하는 독특한 전략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소위 A-B-A’로 수렴되는 제시-전개-재현의 구도를 따르지 않고, 섹션 간의 관계가 굉장히 조밀하게 짜인 것처럼 들립니다. 

홍성지: A-B-A’ 구성을 쓰진 않지만 제 음악에서는 반복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도식화하자면 A-A’-A’’-A’’’ 같은 식으로 반복을 통해 미묘한 차이를 만들며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결국은 다른 곳에 도달하는 흐름입니다. 그런 면에서 곡의 전체 구조가 A-B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많은 작곡가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A-B-A’에는 비율과 비례가 주는 조형미가 있습니다. 또 그 되돌아온다는 측면이 주는 특유의 안정감도 있고, 듣는 사람들은 ‘아까 들었던 부분이다’라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코다가 그래서 좋은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다른 곳에 갔다가 되돌아오지 말고 애초에 가는 여정에서 무언가를 조금씩 반복해주면서 마지막에는 다른 곳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왕복 비행기표를 끊으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똑같으니까요. 

신예슬: 한국을 떠난 뒤 영국 런던과 요크, 그리스 테살로니키를 거쳐 지금은 미국 텍사스에 계십니다. 여러 도시를 오가며 생활해온 그런 삶의 환경은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합니다. 

홍성지: 영국에서 공부하던 6년의 시간 중 2년은 런던에서, 4년은 요크에서 지냈습니다. 런던에서는 새로운 음악 경향을 탐구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요크에서는 자연을 탐색하며 제 내면을 들여다보며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지낸 7년은 깊은 외로움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곡을 쓰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다작을 할 수 있었죠. 미국에서의 삶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경향을 굳이 분류해보자면 제가 쓰는 음악은 미국보다는 유럽 쪽에 가깝습니다. 이 음악이 유럽에서 온 것이기도 하고요. 유럽에 있을 때 이 음악과 여전히 깊게 연결되어 있는 역사와 문화를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제가 곡 제목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특히 라틴어를 다루다 보면 그 이전에 저와 같은 관심을 지녔던 작곡가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음악적 연결점을 찾을 수도 있고, 또 삶 속에서 그 문화를 아주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돌이켜보면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현재는 미국에서 지내고 있고 그리스에서의 시간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유럽이 더 집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신예슬: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삼으신 그림과 그에 담긴 서사는 유럽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유럽이 더 가깝게 느껴지시나요? 

홍성지: 성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맞지만 결국 제가 만든 것은 음악이고, 중요한 것도 음악이니 그 부분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20년 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과 관련된 곡을 쓰려고 노력했다면,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추상적 영역을 탐험한 뒤로는 접근 방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없으니 몰라도 괜찮은 것이죠. 지금은 곡 작업을 시작할 때 모티브를 얻는 정도입니다. 유럽에서 제가 많은 자극을 받는 부분은 음악적인 스타일이에요. 

신예슬: 한 소재를 잡아 작곡을 시작한 뒤에는 어떤 과정에 가장 몰입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구조를 선택하더라도 거시적 차원의 완급조절이 필요할 텐데, 그런 부분은 작곡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조율되는지요. 

홍성지: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쓰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쓰면서 되돌아가며 배치를 계속해서 바꿉니다. 곡을 쓸 때 구조를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요. 작게 시작해서 천천히 자라나면 첫 부분이 지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충격적으로 시작하면 그 긴장감을 지속하기 어렵고, 긴장감을 잃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저는 작품의 완성도가 구조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색채나 순간의 소리가 주는 감각도 중요하고 저도 색채감이 있는 곡들을 좋아하지만 그걸 뒷받침해주는 구조가 강하지 못하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특히 1분, 2분씩 끊어서 다악장으로 만든 호흡이 짧은 곡을 들으면 조금은 아쉽습니다. 그보다는 8분, 10분씩 투쟁해서 그것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갈 것인가, 그 부분을 고민하며 쓴 작품이 제게는 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 음악의 완벽한 구조, 완벽한 소리, 완벽한 부분 말고도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음악이 주는 신비한 감각이 바로 음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무드(mood) 아닐까요. 모든 시간이 다 멈추는 것 같고, 그 음악만 듣는 나를 발견하는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생명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만들어내는 것 이외의 어떤 특별한 영감이 필요한 것 같기는 합니다. 듣는 사람에게도 영감을 주는 곡을 쓰고 싶어서 그런 부분을 많이 고민하지만, 듣는 사람들의 입장은 또 모두 다르겠지요.

신예슬: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연주단체와 함께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고 계십니다. 연주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홍성지: 예전엔 초연 전날에는 초조해서 잠도 못 잤었고, 연주 결과에도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연주 경험이 많이 쌓여서 이전보다 느긋해졌어요. 지금 당장 연주가 잘 안 되어도 언젠가 이 곡을 너무 잘 연주하는 사람을 꼭 만나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고, 또 제가 조정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면 연주자들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화답하고요. 다양한 연주자와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다 보니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다른 한편, 연주자가 미리 정해진 경우엔 제가 이전 연주를 차근히 들어보면서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곡을 쓰기도 합니다. 기량이 몹시 뛰어난 연주자를 만나면 까다로운 테크닉을 도전해볼 때도 있고요. 그건 제게도 큰 모험입니다. 그 사람만 연주할 수 있는 어려운 곡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죠. 하지만 그 만남이 저를 발전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일단은 도전해봅니다. 배우는 건 항상 실패를 통해 배우니까요. 

신예슬: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작곡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홍성지: 연주에서 얻는 기쁨이 가장 큽니다. 연주자들이 제 음악을 좋아해서 저를 찾고, 잘 연주하고 싶어서 노력한다는 데서 무한한 영광을 느껴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