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공연의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창작자들 &〈박창수의 프리뮤직, 침묵을 자유롭게 하다〉 리뷰,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5호』, 2019

공연의 새로운 문법을 만드는 창작자들 ― 라예송ㆍ박민희ㆍ배승빈ㆍ신지수ㆍ오민ㆍ조은희ㆍ성혜인ㆍ신예슬

성혜인 오늘 좌담에서는 보편적인 공연관습에서 벗어난 작업을 하는 창작자분들을 모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혹은 제도권 교육을 통해 훈련받게 되는 음악 공연 의 형태와 성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 새롭게 재고하고 나아가 비트는 작업을 하는 분들을 모시고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시는지,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7쪽)

공연의 무대를 구성하는 방식

박민희 저는 ‘먼저 음악을 창작한 뒤 다른 재료를 활용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는 사람이 에요. 공연으로 만드는 시작점에서 시각적 형태와 청각적 형태, 그리고 듣는 방식을 동시에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시각요소가 음악의 배경으로 작동하는 걸 볼 때 마음이 답답해지곤 해요. 제가 사고하는 방식이 하나의 개념에서 시작해 모든 요소를 동시에 축조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물론 사람마다 사고 과정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제 작업에서는 무엇이 무엇의 도구가 되지 않는 상태가 재미있고 이상적이라고 여겨요. 이를테면 시각ㆍ청각ㆍ촉각ㆍ움직임의 헤테로포니 같은 것? 개별 요소들이 주인공을 돕는 게 아니라 각자 자 신의 위치에 나란히 서서 같은 주제ㆍ이야기ㆍ상태를 구현하는 무대랄까요? 무대? 무대가 뭔지 모르겠어요. (웃음) (10쪽)

오민 저는 관객을 공연자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어요. 관객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거든요. 큰 극장은 조금 덜하겠지만 공연 장소가 작을수록 관객이 공연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죠. 공연을 만들 때 세밀히 미리 결정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 는데, 관객을 일종의 통제 불능의 변수로 설정해 놓습니다. (중략)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또 어떤 태도로 관객을 공연에 초대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관객을 공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관객들은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고 스스로 위험 에 빠지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공연만 집중해서 봐달라는 것도 이미 쉽지 않은 요청 일 수 있고, 덧붙여 수행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어떤 식으로든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고 싶어요. (14쪽)

조은희 많은 창작자가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의 상관관계를 고민하잖아요. 결국 유연함과 밸런스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 되는 것 같은데, 사운드와 비주얼이 인터랙션하는 오디오비주얼 작업을 보면 너무 한 쪽으로 가거나 다른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이 공연에서 내가 궁극적으로 뭘 보여주고 싶은지에 따라 주의해서 집중해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16쪽)

연주자의 몸

배승빈 일단 전통음악 분야에 대해 알고 있어야 제 이야기가 이해될 것 같아요. 연주자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도록 교육받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대학까지 졸업하고 나면 이게 개인의 책임이 되요. 그렇게 연주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예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주자가 곡도 쓰고 연출도 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것들로 채워 공연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잖아요. 그런데 보통은 그냥 때우기 식의 공연을 많이 해요. 커리어 쌓기나 내 욕망의 발현을 위한 공연도 있고, 생계형 공연도 있고(이를 나무랄 순 없을 것 같아요), 조급함에 밀려 하는 공연도 있고요. 저는 기악 연주자로서 레퍼토리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걸 개발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악기가 피리고 이 악기를 오래 공부해왔기 때문에, 피리 전통 안에서 곡을 재편집하거나 새롭게 구성하는 공연을 만들어나가려고 합니다. (19쪽)

박민희 제가 먼저 얘기해볼까요? 체화된 편안한 문법을 신체라고 생각하자면, 노래라는 게 기술적으로 구현될 때 서양 성악가든 아시아 성악가든 발성이나 발음, 굉장히 작은 뉘앙스까지도 선생님한테 배운 습관을 정말 많이 닮아가게 됩니다. 저는 노래가 언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사투리, 어떤 언어를 어렸을 때부터 정말 열심히 배워 서 내 언어로 만드는 과정인 거죠. 그 언어가 내 모국어가 됐는데 서양음악이 지배적 인 상황에서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아요. 쉽게 말해 좋음에 대한 다른 기준들이 문제 가 되는 거죠. 듣기 좋다는 감각에는 학습과 경험이 되게 촘촘하게 작용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학습조차 없어요. 학습 없이는 전통음악을 들을 때 좋음에 대한 기준을 세울 수가 없거든요. 하물 며 경험은 더 없어요. 경험은 개인의 취향을 양산하잖아요. 학습은 기준을 만들어내고요. 기준과 취향 없이 대상화와 타자화로 한국 전통음악에 접근하는 태도가 굉장히 많아요. 오죽하면 대상화나 타자화만 안 해도 좋은 작업자라는 생각이 들겠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대상화와 타자화로 시작해요. 유럽 전통음악을 ‘좋음의 기준’으로 삼는 분들이 제 몸에 체화된 언어를 사용하려 할 때 서로 다른 기준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어요. 가끔은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노래 못하는 메조소프라노처럼 들리는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제가 해온 노래에 대한 탐구와 존경, 언어에 대한 이 해 없이 환상적인 상태를 구현하고자 할 때 가수의 신체가 굴절되는 거죠. (20-21쪽)

신지수 외국인이 대상화를 할 때 그걸 잘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수도 있을 텐데요. 한국 작곡가의 경우는 한국에서 서양음악 작곡을 공부하고 유럽으로 유학 가서 그들이 우리나라 음악을 대상화하는 걸 보고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행위를 보고 따라 하는 일이 생기죠. 그러다 보니 셀프 대상화가 되고 외국인이 대상화를 할 때보다 오히려 수준은 낮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현대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다른 문화권의 연주자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를테면 오페라 가수로 훈련받은 사람의 몸도 굉장히 ‘굴절’시키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도 전통을 깨는 작업을 하는 거죠. (21쪽)

조은희 제가 전통음악 연주자들과 작업했던 이유는 저랑 같이 하시는 분들이 유연하고, 같이 연주할 때 재미있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즉흥음악으로 시작했던 건데, 전통 하시는 분들도 악기가 전통악기인 거지 자기 음악을 하는 거고, 저도 제 음악을 하는 거니까 같이 이야기하면서 음악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근데 하다 보니까 그들이 했던 음악이 궁금해졌어요. 오히려 요즘에는 정악 같은 걸 듣고 흥미로울 때가 더 많아요. (23쪽)

오민 저는 미술가이기 전에 먼저 연주자였고 미술가가 된 이후 음악과 관련이 깊은 작업을 많이 해왔지만, 몸에 관한 현재의 관심은 무용가들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됐어요. 무용가들로부터 그들이 자신의 몸과 수행, 그리고 외부 자극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인식하는지를 배운 후, 상대적으로 연주자들이 몸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물론 연주와 무용은 다른 장르지만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여 공연을 이끌어나간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연주자에게는 ‘구현해야 할 소리’라는 명확한 임무가 있어요. 연습하는 동안에는 그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며 여러 가지 시도를 하지만, 연습이 진행될수록 상상하는 소리에 대한 감각은 더 예민해지고 그만큼 몸에 대한 감각은 흐려집니다. 내 몸을 써서 소리를 만드는 건데, 연주자 시절 내 몸에 관해 그만큼 무관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죠. 그 후로 연주자가 내는 소리보다 연주자의 몸과 그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무용은 다른 목적이 없는 ‘움직임을 위한 움직임’을 만드는 데 비해, 연주는 ‘소리’라는 목적이 먼저 존재하고 그 소리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움직임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리는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기보가 가능 하지만 움직임을 기록하는 것은 정말 어렵죠. 제 궁극적인 관심은 어떤 움직임을 끌어내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제가 만드는 스코어는 분명 악보보다는 무보 에 더 가깝습니다. 이때 움직임은 팔다리를 이용한 움직임뿐 아니라 표정을 비롯한 모든 신체의 반응을 지칭합니다. (24-25쪽)

연주자의 몸과 기보법

조은희 저도 어렸을 때부터 제도권 교육을 받아서 대학 때까지도 악보는 완전해야 하고 그 안에 모든 게 담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렇진 않지만요. <네우마와 정간보>는 관객이 이동하면서 감상하는 작업이었어요. (중략) 이 콘서트에서 네우마와 정간보는 상징적인 의미였어요. 그 둘을 동등하게 다루면서 동서양의 긴 역사적 맥락 안에서 지금까지 음악이 서로 엇갈리면서 나아가는 형태로 작업을 구성했어요. (중략) 기본적인 음에서 출발해 같이 연주하는 과정이 중요했고, 구체적인 모티브를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해보는 작업이어서, 보편적인 오선보를 사용하진 않았어요. (29쪽)

신지수 저는 서양악기 연주자들과 주로 작업해왔는데, 그분들은 같이 뭔가를 만들어 나간다거나 즉흥적 요소가 들어간 작업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커요. 오선보가 아닌 악보를 보면 일단 당황하고, 음표의 머리 모양이 타원이 아니면 무서워해요. 그런 걸 보면서, 연주자들은 악보 형태가 바뀌면 당황하니까 이런 거에 에너지 소모하지 말고 익숙한 형태로 기보해주되, 그걸 연주했을 때 통상적이지 않은 내용이 나오게끔 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성향 자체가 모든 걸 통제하고 싶은 강박 같은 게 있다 보니, 주어진 익숙한 형태로 연주해냈을 때 결과물은 제가 의도한 것으로 나오게끔 하는 거죠. 이렇게 작곡가가 큰 역할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컸지만, 아무래도 서양음악 연주자들은 교육의 영향으로 국악 연주자들보다 즉흥에 덜 익숙하니까요. (29-30쪽)

라예송 제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작업 방식은 두 분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중략) 저는 작곡가, 그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의 작곡가는 기보법을 계속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고민을 하면서 쓴 게 제 석사 졸업논문 「창작의 관점에서 본 전통음 악과 창작음악의 기보법 연구」예요. 졸업하기 위해 쓴 논문이었지만 제가 고민했던 것을 여기서 조금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금도 계속 오선보에 어떤 음(혹은 미분음)을 표기하는 얘기들이 나오는데, 제가 생각하는 음악은 ‘음’에 집중되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선보를 꼭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중략) 이 논문을 쓰면서 고악보를 다시 보니, ‘이 악보를 적을 당시 이 사람한테 뭐가 가장 중요했나, 이 사람이 가장 간직하고 싶었던 게 무엇이었나, 이 사람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나’가 보이더라고요.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 산조 대금 곡을 쓸 때 오선보에 기입이 안 되는 거예요. 오선보에 그릴 수 있는 음이 아무 것도 없어서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아예 산조 대금보를 만들었어요. 그걸로 연주자들과 소통해보니 연주자들은 아주 직관적으로 그걸 보더라고요. (31쪽)

박민희 주로 오선보를 받거나 아니면 작곡가들이 새로 개발한 기보법을 받는데, 저는 제가 받은 교육 때문에 오선보에서 놓치게 되는 게 있어요. 연주자마다 음정과 박자 이런 걸 무엇으로 인식하는지, 그 단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되게 다른 것 같아요. (중략) 노래를 하면서 신체로 음악을 습득한 사람으로서 제가 인식하는 전통음악의 음정은 음고와 음고 사이의 운동성이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고정 음고가 없는 건 아니지만요. 주요음 사이를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를 계면조냐 평조냐에 따라 결정하는 거죠. 그건 신체로 습득된 거예요. 거문고 연주자건, 대금 연주자건 세밀한 신체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무드인데, 제 경우에는 정간보일 때 그 무드를 결정하기가 조금 더 유연하고 쉬운 것 같아요. (33-34쪽)

배승빈 제 공연은 목적과 의도가 좀 분명해요. 보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제가 다루려고 하는 건 일단 전통음악의 다양한 언어들이에요. 이게 근대화된 문법에 의해 왜곡되지 않고, 원래 그랬을 것 같은 모습을 최대한 상상해서, 이 곡을 붙였다가 저 곡을 붙였다가 하는 식으로, 정말 선생님들이 보시면 깜짝 놀라실, 국악계에서 금기시되는 일들을 제가 다 생산하고 있어요. 전통을 왜곡하고 있는 게 서구 문법들이라 저는 그걸 반박하려고 해요. 이것도 전통이고, 이렇게 만드는 것도 전통일 수도 있는데, 왜 전통끼리 그걸 하지 않고 꼭 다른 데서 가져와야 하냐. 뭐랄까 ‘해외직구’처럼 왜 굳이 그렇게 해서 짜깁기를 하냐는 거죠.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문법이 맞지도 않고요. 그래서 전통음악만을 가지고 작업하는 게 제 목표예요. 목적이 뚜렷하죠. 거기에 의미를 두고 공연을 올려요. (41-42쪽)


박창수의 프리뮤직, 침묵을 자유롭게 하다 리뷰

이날 공연에서 박창수는 ‘프리뮤직’이라는 말 뒤에 ‘침묵을 자유롭게 하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부제를 내걸었다. 자유로워지는 것이 음악인지 침묵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든 이 공연은 70분간의 피아노 즉흥연주로 펼쳐졌다. 그런데 이 공연에는 한 관객이 토로한 ‘불협화음’에 앞서 미묘하게 불협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견 즉흥연주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술의전당이라는 공간과 박창수의 음악이었다. (142쪽)

그런데 돌연 모든 것이 갑작스레 멈췄다. 끝을 암시하는 그 어떤 음악적 장치도 없이 박창수는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던 순간에 이제 여기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처럼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진행을 시작해 마치 물줄기가 서서히 굵어지듯 앞과 같은 방식으로 음 한두개로부터 거대한 소리 덩어리들을 만들어내고는 또 별안간 모든 것을 중단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찾아오면 박창수는 때로는 오랫동안 멈추어 있거나, 잠시 움직이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주 어려운 과제를 놓고 골똘히 고민하며 이것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박창수가 선택한 구체적인 전개 방식이나 음의 소재는 그때그때 달라 졌지만, 절정의 순간에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일은 몇 차례나 반복됐다. (144쪽)

때로 즉흥연주를 하는 이들로부터 이미 시작된 음악이 자연스럽게 가려고 하는 방향과 자신이 의도적으로 이끌고 가려는 방향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홀로 즉흥연주를 할 때도 음악과 자신이 줄다리기를 하듯 힘의 균형을 맞춰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날 연주를 바라본다면, 이는 음악과 연주자가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러 평화롭게 끝맺는 게 아니라 가장 극심하게 충돌하는 순간에 더 이상 음악이 지속 될 수 없어서 끝나버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술의전당이라는 조건하에서 그보다 더 과한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단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날 박 창수는 공연의 끝을 어떻게 느꼈을까. 이 공연의 끝에서 피아노가 그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이 음악이 대체 어디까지 뻗어 나갔을지 알고 싶었다. (145-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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