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이전의 노래 – 서울아트시네마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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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시네토크를 맡은 신예슬입니다. 보통 아트시네마의 시네 토크에서는 영화 텍스트나 감독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리하르트 바그너 주간’, 즉 작곡가가 메인에 등장한 영화주간이고, 저는 음악을 듣는 사람이니까 오늘 시네토크에서는 제가 음악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토크에서는 거의 같은 제목인 것처럼 착각하기 딱 좋은 <니벨룽의 반지>라고 하는 바그너의 작품이 지금 함께 보신 프릿츠 랑의 영화 <니벨룽의 노래>와 어떤 접점이 있는지, 그리고 바그너와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어떤 친연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를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약 200년 전인 1813년에 태어나서 1883년에 독일에서 죽은 바그너라는 인물은 당대 최고 스타 중 하나였습니다. 오페라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 자신은 ‘음악극’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작품들을 주로 썼고, 단순히 음악계 안에서만 큰 인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니체가 『니체 대 바그너』 같은 책을 쓰기도 할 정도로 당시의 걸출한 인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복잡다단한 관계망 속에 위치한 만큼, 저는 바그너라는 작곡가가 음악 전공자들에게도 진입하기 어려운 축에 속하는 작곡가라고 봅니다. 으레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작곡가는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나 작곡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해있고, 다들 이들의 작법을 꼼꼼히 파악하고, 끝없이 반복해서 듣고 분석하며 몸에 익혀내는 작곡가인 데 반해 바그너는 우선 ‘듣는다는 것’에서부터 큰 장벽이 있습니다. 작품의 규모나 길이가 모두 다 큰 탓입니다. 게다가 문장에 비유하자면 만연체에 가까운 음악언어를 구사하는데, 기나긴 문장으로 복잡한 서사를 얘기하는데 긴장감은 그때그때 해소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쌓여가고, 계속 누적이 되는 구조라고 할까요. 바그너는 실제로 말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음악도 그 성격을 반영하는 것인지, 음악을 듣다 보면 끝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빠져들지 못한다면, 한 귀에 듣기 어려운 건 사실이죠.

그리고 바그너 음악의 정수라고 하는 것은 (오페라라고도 불리지만) 음악극이었습니다. 혹은 바그너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가 만든건 단순한 오페라도 아니고 무대와 음악과 대본과 연출이 모두 한데 모여 동등한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통합된 세계를 만드는 ‘총체예술작품’이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오페라를 보던 눈으로 보기보다는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또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오페라에서는 극이 먼저냐 음악이 먼저냐, 가사가 먼저냐 노래가 먼저냐 등,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 종종 논쟁거리가 됐었는데 바그너는 이런 전후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서로가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니 이러한 이슈들이 무력화되는 것이죠. 따라서 바그너의 작품에서는 놓쳐도 괜찮은 것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거대한 이야기를 무대화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들려주듯 음악을 만들어내고, 연출과 무대에 관한 아주 뚜렷한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점은 한 명의 작곡가가 꿈꿀 수 있는 굉장히 멋지고 근사한데다 전례없이 야망찬 욕망이긴 했겠지만, 이는 그만큼 보고 듣는 이에게도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오늘의 영화, 프릿츠 랑의 <니벨룽의 노래>와 관련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니벨룽의 반지>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바그너라는 야망찬 인물이 거의 25년이 넘는 시간동안 쓴 작품이 <니벨룽의 반지>입니다. 이 작품은 바그너 인생 최대의 역작이자 대작으로, 반지 싸이클 혹은 그냥 ‘반지’라고도 약칭되기도 합니다. 이건 총 4부로 나뉘어져 있고 각 장의 제목은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이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연주에 따라서 길이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보통은 열 여섯시간이 걸린다는 게 중론입니다. 이 각 장을 하나하나씩 영화로 만든다고 해도 2부작씩이 되어야 할 것 같은 규모에 가깝습니다. 오늘 상영된 프리츠 랑의 <니벨룽의 노래> 다 해서 다섯 시간 정도였으니, 오페라에 비하면 나름 나쁘지 않은 러닝타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결코 오페라는 길고 영화는 짧다고 속단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오페라의 근본적인 형식이 무엇이든 ‘빠르게’ 보여주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내용을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노래로 하게 되면 전달력도 떨어지고, 서사진행도 느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또 음악극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그 실황을 원본 형태로 하기 때문에, 감상과 제작이 모두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려면 막을 내리고 무대를 바꿔야 하기도 한다는 물리적인 제약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무대는 가상의 공간이니까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야 있겠지만 이미 하나의 장면으로 세팅된 곳에서는 딱 그 시공에서 펼쳐질 수 있는 얘기들만 하게 되니, 아무래도 전환이라는 것이 아주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오페라와 영화의 이런 매체의 차이도 있겠지만, 프리츠 랑의 영화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근본적인 차이는 서사구조입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니벨룽의 노래’라고 불리는 13세기 서사시를 원전으로 합니다. 니벨룽은 독일 북부에 살았다는 난장이족의 이름인데 귀한 보물들을 쌓아놓고 지켰다고 하죠. 이 원전의 이야기는 으레 오래된 이야기가 그러하듯, 왕족 가문에서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몇몇 사건과 전쟁들, 그리고 영웅적인 인물의 이야기, 그러니까 약간의 신화적 세팅이 더해진 왕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프리츠 랑의 경우는 이 원전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영화화합니다. 그래서 이야기 구조 자체만 보자면 원형에 가깝습니다.

반면 바그너는 이 원전을 정말로 일종의 ‘모티브’처럼 사용해서 이걸 또 다른 전설의 이야기와 섞어버립니다. 신화와 신과 반신과 사랑과 전쟁과 보물과 괴물과 사랑의 묘약 같은 장치가 산재하는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버린 거죠. 사실상 재창작에 가깝습니다. 마블 스튜디오가 북유럽 신화 속의 ‘토르’ 얘기를 꺼내오면서 마블 세계관의 다른 히어로들과 만나게 하면서 어떤 이야기간의 접점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더 복잡다단한 서사를 형성해내는 것처럼, 바그너는 게르만 신화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더더욱 판타지에 가까운 일종의 동화를 만들어냅니다. 보탄이라는 신과 신이 사는 세계가 있고, 지하세계에 사는 니벨룽족이라는 난장이들이 있고, 지크프리트라는 영웅이 사는 인간의 세계가 있고, 절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반지가 있고, 한편으로는 반지의 제왕에서 바로 이 바그너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설도 있는데, 권력과 암투와 시기, 질투와 욕망, 사랑, 배신, 복수 등등 이런 온갖 이야기가 산재한 복잡한 세계를 형성한 것이죠.

그러니까 바그너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 허무할 수도 있겠지만 이 프리츠 랑의 <니벨룽의 노래>는 그냥 원전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사실상 별다른 관련이 없는 작품입니다. 서사적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그 원형이 같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걸 소재로 한명은 원전에 가깝게, 한명은 재창작에 가깝게 풀어낸 것이며,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둘은 서로 평행한 선상에 놓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 왜 프리츠 랑이 바그너 <반지>에 있는 그 수많은 모티브들을 왜 이용하지 않았는지, 오히려 그 부분이 의문이었습니다.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하랄드 라이늘의 <니벨룽겐(1966/67)>, 울리 에델의 <니벨룽겐의 반지(2004)>의 경우는 바그너의 <반지>에 나타난 모티브들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리츠 랑의 영화는 1924년에 만들어졌고, 바그너의 음악극은 1876년에 초연됐습니다. 이 작품은 초연부터 큰 화젯거리가 됐으니 프리츠 랑이 이 작품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의도저으로 바그너의 반지를 신경쓰지 않은 것일텐데, 추측을 해보자면 1. 바그너와 엮이기 싫었거나 2. 바그너 이후의 것으로 취급받기 싫었거나 3. 순수하게 ‘니벨룽엔 노래’만 가지고 쓰고 싶었거나, 이런 이유들이 있었겠죠. 혹은, 히틀러의 나치당이 부상하고 있던 때에 바그너와 히틀러를 분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일가와 굉장히 가깝게 지냈고, 그 자신이 바그너의 음악을 굉장히 사랑했고, 바그너의 작품에서 암암리에 엿보이는 반유대주의나 게르만 중심주의 같은 것이 랑의 입장에서는 몹시 껄끄러웠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서사구조에서 바그너와의 연관성을 피했다면 음악만큼은 바그너의 것을 차용할 수도 있겠냐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오늘 상영본의 경우, 중간중간 ‘바그너 풍’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바그너의 음악을 가져다 썼다고 보기는 어렵고, 근본적으로 이 영화의 음악이 바그너적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건 한편으로 이것이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거나 아예 답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형성되어온 영화음악의 어법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바그너의 음악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말하자면 일부 영화음악의 어법이 이미 ‘바그너적’이기 때문에 이 음악이 ‘바그너’를 차용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더더욱 오리무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토크에서 얘기해보고 싶은 마지막 주제는 영화와 바그너의 친연성입니다. 영화의 입장에서 바그너를 보았을 때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영화음악’에 바그너가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영화음악 문법의 시초라고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바그너의 음악이 영화에 적합했다면 그 음악이 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아야겠죠. 바그너의 음악에서 굉장히 재밌는 것 중 하나는, 이 사람이 음악보다 대본을 먼저 썼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이야기를 중요히 생각하기도 했고, 스스로 나는 작곡가이자 대본가라고도 언급했고요. 어쩌면 이 <니벨룽의 반지>를 이끌어가는 아주 근본적인 논리가 있다고 하면, 그건 아주 순수하게 음악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대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대본이 먼저 쓰였다니, 어쩌면 이야기의 논리가 그 근간일 수도 있겠죠. 물론 음악가가 쓴 글이니까 그 글 자체가 음악적인 리듬을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창작단계에서 순서상 음악보다 이야기가 우선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극이 진행되는 것을 봐도, 음악은 이야기의 논리를 충실히 수행합니다. 무대 위로 ‘지크프리트’가 걸어나오면 지크프리트의 테마가 울려퍼지고, 누군가 죽으면 또 죽음의 테마가 나오고. 사랑의 묘약이 나오면 사랑의 묘약 테마가 나와요. 이를테면 지크프리트가 사랑의 묘약을 먹고 죽으면 그 세 개의 테마가 동시에 울려 퍼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굉장히 많이 접해왔습니다. 아주 최근의 영화음악은 경향이 조금 달라지는 듯하지만, 드라마 사운드트랙 같은 경우에서 여전히 아주 노골적으로 쓰이고요.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음악이 달라지고, 그 인물을 상징하는 음악이 계속 나오고, ‘불안’을 상징하는 음악이 극의 진행에 맞춰 나오는 식입니다. 어떤 경향성을 얘기하긴 어렵습니다만 경험상 80-90년대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보면 트랙 이름이 ‘누구의 테마’, ‘누구의 테마’ 이런 식으로 적혀있던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음향이나 톤, 정서 등, 인물이나 사물에 일차적으로 대입되지 않는 것들을 주제화하고, 음악 자체가 극으로부터 조금은 더 독립되어 개별적인 레이어를 형성하게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이 ‘테마’의 전통이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다시 바그너로 돌아가자면, 바그너의 음악은 물론 음악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음악이 무대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까, 음악만으로 모든 것을 감지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는 바그너의 음악을 ‘듣기’ 어렵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봅니다. 만약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살아움직이는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계속 극과 음악이 연결되는 광경을 봤다면 음악이 너무너무 재밌었을 거예요. 우리가 실제로 몇몇 영화나 드라마에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료되는 것처럼요. 근데 눈에 보이는 이야기 없이 대사나 이야기에 맞춰서 만들어진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어렵다는 것이죠. 무대에서 보이는 것들과 너무 깊게 연관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물론 애초에 길고, 이야기도 복잡하고, 신화 소재도 많고, 독일어니까 독일어와 거리가 먼 감상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아주 근본적인 형식에서도 그런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보이는 것들과 함께 듣게 만들어진 음악을 귀로만 따라가기 어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음악 어법이 영화, 즉 눈으로도 봐야 하는 것에 적합한 영화음악의 기본 문법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 듯합니다. 음악이 바그너의 작품에서 극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으니까, 음악만 듣자면 어딘가 빠진 게 있는거죠. 영화 없이 영화음악을 듣는 것 같다고 할까요. 물론 오늘날에도 가끔 영화음악만 들어도 영화가 눈 앞에서 스쳐지나가는 것 같다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많이들 하곤 하지만, 이 음악이 ‘영화음악’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영화음악을 음악처럼 들으면 그 음악에 가까워지기 어렵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아주 높겠죠.

다시 영화의 입장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런 것처럼 바그너의 음악이 영화에 적합한 음악이었다면, 이건 막연한 추측일 수 있지만 바그너가 만들어낸 그 작품들도 혹시 오늘날 우리가 영화에 기대하는 것들, 혹은 영화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바그너가 바란 건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바란건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무대와 연출과 음악이 모두 동등하게 결합되어 하나의 총체적인 작품을 만드는 바그너의 음악이 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오늘날의 영화랑 상당히 맞닿아있는 것 같아요. 물론 연극이라는 같은 종류의 극예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음악이 무대에 개입하고 작품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보면, 문득 영화에서의 카메라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통 무대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장면을 계속 같은 사이즈로 보는 것이고, 바그너 시대에서는 무대를 벗어나는 극예술은 사실 없었으니까 관객은 같은 앵글로 무언가를 계속 봤겠죠. 그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창작자라면 매 순간순간 더 강조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얘기나 장면이 있었겠죠. 그 무대라는 현장에서는 클라이막스의 표현이 언제나 물리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창작자들은 여러 장치들을 마련해왔습니다. 무대 장치를 아주 미리 만들어놓는다거나, 전환을 이용한다거나, 연기자가 죽는 장면, 쓰러지는 장면, 싸우는 장면, 같은 걸 굉장히 극적으로 연기하거나, 몸을 크게 움직이거나, 음악의 볼륨을 확 조절한다거나, 아주 높은 고음을 들려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클라이막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왔죠. 하지만 ‘사랑의 묘약’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아주 난처합니다. 그 드넓은 무대에서 이 묘약에 시선을 맞추게 하기 위해 묘약을 크게 만들 수도 없고, 던질 수도 없고, 손에 쥐어야만 하는 것을 모두에게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수를 써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으로 그 묘약의 존재를 알려주고 감상자들이 거기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은 꽤나 효율적인 방안이었던 듯합니다. 즉, 영화에서 뭔가를 강조해서 보여주는 방법 중 하나가 카메라의 클로즈업이라면, 바그너의 작품에서는 음악이 그 카메라의 클로즈업처럼 무대의 한 부분에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어떤 ‘편집’이 일어나는 듯합니다. 거칠게 구분해보자면, 무대가 이야기가 벌어지는 날것의 사건현장이라면 음악은 그것을 편집하고 재구성해낸 결과라고 할까요.

대본을 써놓고 음악을 만들어가면서 바그너는 머릿속으로 무슨 장면을 떠올렸을까요. 이미 연극적인 무대는 이미 다 마련되어 있었을 테고, 등장인물의 동선과 연기 톤, 이런 것도 다 머릿속으로 이미 상상이 끝났겠죠. 그런데 이 바그너라는 사람이 음악을 만들면서 머릿속에서 보고 있던 장면은, 누군가 객석에 앉아서 풀샷으로 볼 수밖에 없는 ‘무대 전체’가 절대로 아니었을 거라고 감히 추측합니다. 그보다는 그 무대에서 자기가 특별히 더 보고 싶었던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편집해가며 그에 맞는 음악을 썼겠죠. 그런 면을 생각해보면, 바그너는 어쩌면 이미 머릿속으로 음악을 쓰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의 상태, 혹은 영화적인 장면들을 상상한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영원히 검증할 수 없는 질문도 던지게 됩니다.

오늘 토크에서는 저라는 제한조건 탓에 사실상 프릿츠 랑의 <니벨룽의 노래>가 대체 어떠한 종류의 영화인지에 대해서 얘기하기보다는 거의 바그너와 <반지>와 영화 <니벨룽의 노래>의 모호한 관계, 그리고 영화라는 렌즈로 바그너를 봤을 때 무슨 생각들을 할 수 있는가라는 얘기를 주로 나누게 됐습니다. 혹시 이 프릿츠 랑의 <니벨룽의 노래>와 같은 원전을 공유하는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가 어떻게 실제로 무대화되는지 궁금하시다면, 다음 주에 예술의전당에서 <니벨룽의 반지> 중 1부, ‘라인의 황금’이 굉장히 흥미로운 무대 연출로 공연될 예정이니 그쪽으로 찾아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준비한 토크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년 11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시네마테크 서울), 시네토크 내용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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