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부뉴엘의 함정, 오페라 절멸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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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절멸의 천사> 포스터

토마스 아데스의 오페라 <절멸의 천사>

2017년 10월 23일 Metropolitan Opera House, Dress Rehearsal
2017년 11월 18일 BAM Rose Cinemas, Live in HD

1.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의 어느 날, 함께 오페라를 본 부르주아들이 노빌레 부부의 호화로운 저택에 초대받아 만찬을 즐긴다. 훌륭한 음식과 우아한 담소, 수준 높은 음악을 충분히 즐긴 부르주아들은 슬슬 집에 돌아가려 하지만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저택을 떠나지 못한다. 가둔 자 없는 감금이 시작되고, 무작정 고립된 부르주아들은 예의와 존엄, 이성을 차츰 잃는다. 그렇게 엉망진창 카니발이 펼쳐진다.

음악이 단 2곡밖에 나오지 않는 이 고요한 영화,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절멸의 천사>(Exterminating Angel, 1962)에는 이상하게도 음악에 관한 설정들이 포진해있다. ‘오페라’를 막 보고 나온 부르주아들. 그 안의 피아니스트, 소프라노, 지휘자. 파라디시(P. D. Paradisi)의 <소나타 6번>이 연주된 뒤 부르주아들이 공간에 갇히고 그 상황을 ‘재현’해야 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설정,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부르주아들의 입장과 축배사. ‘오페라’로 만들기에 고루 탁월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설정은 동시에 갇혀버리기 쉬운 덫이다. 부뉴엘이 특별히 선택한 이 설정들에 홀려 아무런 전략 없이 이 영화를 ‘오페라 전통’을 충실히 따른 음악으로 직역하는 순간 그 오페라는 부뉴엘이 설치해놓은 조롱의 덫에 자진해서 들어간, 부뉴엘이 구축해놓은 세계 ‘속의’ 오페라로 포섭되어버린다. 어려운 게임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동명의 오페라 <절멸의 천사>(Exterminating Angel, 2016)로 만든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Thomas Adès)는 부뉴엘의 이 미끼를 덥석 문 또 한 명의 ‘부르주아’가 되었나? 아니면 기꺼이 자신이 대표할 수밖에 없는 클래식-오페라 전통을 깔깔거리며 비웃는 자기모순적인 인물이 되어 부뉴엘의 놀이에 플레이어로 동참하는 데 성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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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멸의 천사>,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2.
원작의 흐름을 차근히 극으로 재현하는 이 오페라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동일하게 안전한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G음의 튜블라벨 소리가 서서히 F, A♭음으로 확장되고, 계속해서 나선형으로 움직임을 키워나간다. 이 음산한 인트로는 본격적으로 사건이 진행되기 전부터 이미 어떤 균열과 균형의 상실을 예정한다. 소용돌이가 조금씩 커지고 빨라지자 ‘절멸’의 전조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프롤레타리아, 저택의 하인들이 하나둘씩 집을 떠난다.

어떤 운명이 들이닥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부르주아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입장한다. 서주의 음산함이 슬며시 사그라든다. 부르주아들은 한껏 목소리를 치켜세우며 자신을 소개하고, 금관의 불규칙한 리듬은 부르주아의 목소리와 의도적으로 어긋나며 인물들에 대한 가벼운 경멸을 표현한다.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는 벨칸토1)로 노래되는 부르주아들의 정보값 없는 가식적인 대화를 우습게 대상화하기도, 혹은 곧장 그 거리를 좁히고 부르주아들이 부르는 히스테릭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카메라가 디제시스 밖 연출자의 시선을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오케스트라는 ‘오페라 전통’과 ‘부뉴엘’ 사이를 팽팽히 오가는 아데스의 시선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오페라’라는 형식을 선택한 이상 부뉴엘의 조롱조의 시선에만 장단을 맞출 순 없다. 아데스는 극을 촘촘히 따라가면서도 때에 따라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의 디제시스를 적절히 분리해 부르주아들을 대상화하고, 또 하나로 엮어 부르주아들을 대변하는 유연한 전략을 취한다.

(후략)

전문: 헤테로포니
http://heterophony.kr/2211974466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