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 골드베르크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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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타로 – 골드베르크 변주곡
2016년 6월 8일 엘지아트센터

 ‘다음 페이지를 연주하세요.’ 라는 미션을 받은 듯한 연주였다. 타로는 이미 머리 속에서 완성된 구체적이고 단단한 소리구조를 그대로 소리로 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러프한 계획에 맞춰 그때그때 충실하게 음을 읽어냈다. 한 작품이라는 미지의, 게다가 추상적인 존재덩어리를 그 전체 그대로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음들을 하나씩 맞춰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골드베르크. 골드베르크는 부분들의 모음으로 인식되기에는 이미 너무 완전한 작품덩어리처럼 받아들여져왔고, 그 완전한 작품만큼 완벽한 연주들이 이미 음반시장에 산재해있다. 하지만 타로의 골드베르크는 정말로 실황연주다운 실황연주였다. 음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완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고, 디테일은 완벽히 정돈되었다기보다는 유동적이었고, 음반 특유의 고정되고 완벽한 연주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생성적인 연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여전히 작품 전체를 관망해야한다. 이 음과 다음 음, 이 멜로디와 다음 멜로디, 이 프레이즈와 다음 프레이즈, 이 변주와 다음 변주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연주 전에 충분히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골드베르크를 쉼없이 연주한다고 했을 때는 더하다. 변주와 변주 사이에 얼마나 쉴 것인지, 혹은 아타카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실황연주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고 세밀하게 통제하기는 불가능하다. 긴장과 이완이라는 음악의 근본적인 형식에 대한 준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음반이라면 여러 테이크를 조합해서라도 어떻게든 최상의 것을 만들 수 있겠지만.) 타로는 정확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정확한 뉘앙스를 선택했다. 명시되어있지 않은 숨은 긴장과 이완을 드러내고, 본인 스스로도 아주 공들여 완벽한 소리를 구현하는 프레이즈와 그저 손이 가게 내버려두는 듯한 프레이즈를 적절히 배치했다.

타로의 연주처럼 완급조절을 잘 하지 않으면 골드베르크는 모든 프레이즈가 의미심장한 펀치라인으로, 따라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찾기 어려운 곡이 되고만다. 골드베르크는 복잡한 곡이다. 아주 단순하고 투명한 주제로 시작하지만 그 수많은 변주들은 리듬과 선율이 각각 다 뚜렷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한 변주 안에서 춤곡에서 푸가로 바뀌어버리거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마태 수난곡의 잔해들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리듬에서는 쿠프랭이 들리기도, 오케스트라로 연주해야할 것 같은 패시지가 나오기도 한다. 바흐는 그 곡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제목을 명시하지 않거나 ‘아리아’ 등의 의뭉스러운 이름만 붙여놓았지만 그 음들에는 바흐 이전의 양식들이 숨겨져있다. 당대에는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겠지만 시간이 흐르니 그 양식의 기원들은 다소 비밀스러운 것이 되었고, 추상이라는 개념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아르농쿠르가 말했듯 바로크 음악은 ‘말’하지 않았겠나. 골드베르크의 변주들은 이미 말해진 소리들이었고, 지칭가능한 ‘그’ 양식들이었다. 골드베르크를 충실히 연주하고자 하는 이들은, 혹은 골드베르크를 연주할 준비가 된 음악가들은 이를 마땅히 알아야한다. 그러나 이걸 모두 완벽히 구현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이가 무대에 오른다면 바흐 특유의 투명한 소리를 잃게된다. 게다가 바흐는 음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종지를 향해 가는 최단거리를 제시하고 이를 쉼없이 달려가게 만든다. 음의 흐름을 쫓아가다보면 본인의 호흡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 중압감에 눌리지 않고 골드베르크를 자연스럽게 보여준 타로의 연주는 정말 탁월했다. 때로 즉흥적인 느낌도 들고, 완벽히 재단되었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했지만, 바로 그 점이 훌륭했다. 노트 이네갈르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할 정도로 음가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모습은 시간을 잘 다룰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물론 타로가 수많은 유형의 춤곡에 능하고, 바로크 음악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반 앞에 앉아서, 샛노란 조명 아래에서, 알 수 없는 청중들이 뚫어져라 자신의 오른쪽 면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왼쪽에는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넘순이가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음에도,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시간을 조절하다니. 빠르게 몰아쳤다가 까다로운 패시지에서는 능청스럽게 느려지는 걸 보고 정말 하나도 긴장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중간중간 보이던 다양한 제스쳐도 마찬가지.

상징적인 연주를 해내는 연주자들이 있다. 추상적이고, 들리는 소리보다 이면에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상정하고, 결코 말로 지칭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들이 가득 찬 듯한 작품들에 관한 연주들. 타로는 이런 타입의 연주와 정 반대다. 타로의 음악은 아주 명시적이고, 들리는 소리 이면의 어떤 상징적인 것을 보여준다거나, ‘구조적 청취’로서만 성취가능한 어떤 감상을 전제하지 않는다. 들리는 소리를 도구삼아 그 이면의 들리지 않는 환상을 구현하려 하지도 않는다. 타로의 연주는 물리적인 즐거움을 주는 건강한 소리다. 피아노를 다루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타로의 손은 피아노의 물리적인 속성을, 어떤 액션을 거쳐 이 소리가 나는지를 감각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다른 타입의 연주자지만, 타로는 소콜로프같은 타건의 대가다.

결함없는 타건이 주는 쾌감은 꽤 대단하다. 앙코르곡이었던 스카를라티는 난이도 높은 게임을 한번에 클리어해버리는 듯했다. 연타가 까다로운 그 곡을 심지어 웃으며 연주하는데 패시지가 끝날 때마다 따로 존경의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의 쉼표에서는 손바닥을 쫙 펴서 마치 피아노가 반려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잠깐 기다려.’ 라는 느낌으로 연주를 (본인이 하는 것임에도) 중단시키고, 다시 아주 정확한 때에 연주를 재개하는 그 모습까지. 갈고닦은 곡이어서 그런지 정말 무대에서 보기드문 능수능란함이었다. 앙코르까지 포함해서 90분간 진행된 짧은 독주회였다. 대단히 감각적인 터치. 피아니스트다운 음악. 타로의 완벽한 음반도 감상하기에 참 좋지만, 타로의 실황연주는 음반감상 이상의 대단한 경험이다. 다음 내한때는 뭘 연주할까. 메시앙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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