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F: Gérard Gris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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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F앙상블 작곡가 시리즈 10Gérard Grisey

2017년 5월 10일 오후 7시 30분 한남동 일신홀

“음악은 음(tone)이 아니라 소리(sound)로 만들어집니다. (…) 우리는 음악가이며, 음악가가 따라야 할 것은 문학이나 수학이나 연극, 시각예술 등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소리’입니다.”

이번 TIMF앙상블 작곡가 시리즈의 주인공인 프랑스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이(Gérard Grisey, 1946-1998)가 주목한 대상은 바로 이 ‘소리’다. 일찍이 분광기가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한 것처럼, 20세기 전자음악의 발달은 음악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로 인식되어왔던 하나의 음과 그 소리를 더 미시적으로 분석해냈다. 컴퓨터로 생성한 소리와 달리 악기 소리는 연주되는 해당 음과 함께 다수의 ‘배음’이 울리기 때문에 몇몇 작곡가들은 컴퓨터로 악기의 음색을 모사하기 위해 악기 소리를 상세히 분석했다. 그런데 그리제이를 비롯한 몇몇 작곡가들은 이 분석결과로 소리를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기악음악’ 창작을 시도했다. 오늘날 스펙트럴리즘(spectralism)이라 불리는 사조는 기본적으로 이처럼 한 소리의 음향학적 분석 결과에서 출발한 음악을 지칭한다. 하나의 소리 안에서 음악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 1970년대의 일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단순히 소리재료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응용되는 그리제이의 ‘작법’이자 하나의 사조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통합적으로 작용했다. 뒤티외(H. Dutilleux), 메시앙(O. Messiaen)에게 음악을 배운 그리제이는 파리 음악원 졸업 후 다름슈타트에서 슈톡하우젠(K. Stockhausen)과 리게티(G. Ligeti)의 강의를 접하며 시간에 대한 슈톡하우젠의 사고방식과 점진적으로 변형하는 형태를 띠는 리게티의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음렬음악의 인위성에 한계를 느껴 ‘자연적 재료와 그 속성에 상응하는 형식’을 필요로 했다. 새로운 재료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음악을 구성하는 새로운 형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73년 그리제이는 뮈라이(T. Murail), 레비나스(M. Levinas) 등과 함께 앙상블 리티네레르(L’Itinéraire)를 창단하며 배음렬을 이용한 창작방법을 본격적으로 탐구했고, 약 2년 뒤부터 이를 작곡에 적용했다.

그리제이의 음악은 하나의 소리에서 비롯되는 협화적 배음렬부터 점차 불협화적인 배음렬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했고, 대부분 뚜렷한 인과관계에 의한 도식적 구조를 갖기보다는 끝없이 흘러가는 듯한 선형적 진행에 가깝게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서 건축적 구조보다는 연속적인 시간과 경험적 차원이 깊게 고려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에 대한 그리제이의 생각은 작품 고유의 내적 시간부터 청취자들이 실제로 경험하게 될 시간까지 상당히 다양했는데,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시간에 대한 숙고”(1979), “Tempus ex machina, 음악적 시간성에 관한 어느 작곡가의 숙고”(1982) 등의 글로도 다뤘다.

이번 공연은 타악기 주자를 위한 <Stèle>(1995)부터 그의 초기작 <Échanges>(1968), 74년부터 85년까지 작곡된 대규모 연작 중 ‘Prologue’(1976), 그리고 말년의 대작 <Vortex Temporum>(1994-96)까지 총 네 곡으로, 그의 대표작을 선보이면서도 시기적으로도 그리제이의 음악세계가 어떤 식으로 확장되었는지 차근히 따라갈 수 있게 구성되었다. 한 음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가능성에 주목한 그리제이의 음악은 하나의 입체적인 ‘작품’을 듣는 동시에 하나의 ‘소리’을 총체적으로 확장해서 듣는 경험을 선사한다.

Stèle(1995)

작품 제목은 ‘비석’이라는 뜻으로, 그리제이가 고고학자들이 비석을 발견하고 거기에 적힌 비문을 읽기 위해 먼지를 털어내는 장면을 상상하며 쓴 곡이다. 편성은 두 대의 큰북뿐이지만 연주자들은 북의 표면을 손으로 긁는 것부터 시작해서 작은 울림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게 두드리다가 점차 폭발적으로 북을 타격하는 등, 손의 제스쳐와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북으로부터 다채로운 소리를 끌어낸다. 두 대의 큰북은 주기적인 리듬 위에서 계획적으로 배치된 소리를 연주한다기보다는 서로에게 화답하며 끝없이 공명하는 관계에 놓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 큰 북의 풍성한 울림은 어떤 깊은 공간에 들어간 것 같은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Échanges(1968)

그리제이의 첫 번째 작품으로, 프리페어드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작품이다. ‘교환’이라는 작품 제목처럼 한 악기가 어떤 음향을 만들어내면 다른 악기가 곧바로 그에 상응할 수 있을 만한 음향으로 응답한다. 이 곡은 콘트라베이스에서도 다양한 주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만, 특히 피아노 파트에서 악기의 음색적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피아노는 타건을 하는 연주자, 피아노 내부의 현을 손으로 직접 치며 타건에 맞춰 음색 변형를 준비하는 연주자 총 두 명에 의해 연주된다. 때로는 두 연주자 모두 피아노 내부의 나무나 건반 뚜껑을 치는 등 피아노를 음정이 없는 타악기처럼 연주하기도 한다.

 

Les Espaces Acoustique – Prologue(1976)

그리제이의 대표작 중 하나로, 총 7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연작이다. ‘음향적 공간들’이라는 제목의 이 연작은 비올라 독주를 위한 서곡(Prologue), 7명의 연주자를 위한 주기(Périodes), 16명 혹은 18명의 연주자를 위한 부분음들(Partiels), 33명의 연주자를 위한 변조(Modulations), 대편성의 관현악을 위한 일시성(Transitoires), 대편성의 관현악과 4명의 독주 호른을 위한 종장(Épilogue), 두 그룹의 관현악을 위한 일탈(Dérives)로 점차 그 편성과 음악적 규모가 차츰 확장되는 식으로 구성된다. 한 곡의 끝과 다음 곡의 시작은 서로 맞물리기 때문에 본래 전곡이 쉼 없이 연주하게 되어있다. 이 연작의 첫 문을 여는 서곡은 ‘미’(E) 음정의 배음렬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일부인 3배음 ‘시’(B)가 강조되는 형태로 시작한다. 곧 협화적 배음렬이 이 음정을 맴돌 듯 연주되다가 점차 불협화적 배음렬로 향하며 주법 역시 거칠어진다. 이 곡에서는 음과 음 사이에 인위적으로 부여된 ‘인력’ 없이, 유영하는 듯한 자유로운 음의 행렬이 만들어진다.

 

Vortex Temporum(1994-1996)

‘시간의 소용돌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그리제이 말년의 걸작으로, 끝없이 회전하는 아르페지오가 반복 및 변용되는 곡이다. 음악적으로 직접 인용되어 있지는 않지만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아르페지오는 라벨(Maurice Ravel)의 <Daphnis et Chloé>의 율동감을 차용해 만든 것이다. 작품은 세 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악장은 일반적 시간, 2악장은 팽창된 시간, 3악장은 수축된 시간으로 각 악장은 서로 다른 시간감을 만들어낸다. 각 악장 사이에는 짧은 간주곡이 배치되며 이는 서로 다른 시간을 이어줄 수 있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인간의 눈, 현미경, 망원경처럼 각 악장을 구성하는 시간감이 다른 만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아르페지오의 처리방식도 달라진다. 1악장에서 아르페지오는 팽팽한 분위기 안에서 “환호성을 지르는 듯한” 느낌으로 구현되지만 2악장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 형태를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늘어뜨려진다. 3악장의 시작은 1악장과 거의 동일하나 아르페지오라는 음악적 대상에서 멀어지듯 점차 희미해지며, 노이즈에 가까운 소리로 뒤덮이고, 시간이 수축되는 만큼 음악적 정보들도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다. 아르페지오라는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음악적 시간으로 펼쳐낸 이 곡은 단순히 대상을 보는 시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악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차원에 들어가듯 음색과 세밀한 아티큘레이션, 뉘앙스 등 음악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가 총체적으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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