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트라이틀러: 해석학, 성서해석학, 혹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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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해석은 때로 음악이 무엇을 표현한다거나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해석의 근거는 과연 견고한가? 레오 트라이틀러는 이 글에서 ‘음악해석학’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졌던 두 작업을 촘촘히 살펴보며 음악의 해석에 내재한 난점들을 점검한다.

트라이틀러는 먼저 음악의 해석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음악의 해석은 음악을 더 깊고 풍성히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데 혹자는 특정한 해석을 도출하기 위해 음악을 사용한다. 트라이틀러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크레이머(Lawrence Kramer)의 글 “비유와 창: 음악해석학의 개요 Tropes and Windows: An Outline of Musical Hermeneutic”에 나타나는 크레이머의 해석이 궁극적으로 ‘음악’을 위한 것인지 혹은 ‘해석’을 위한 것인지를 주의 깊게 검토한다.

나아가 그는 분석과 해석의 관계에 주목한다. 음악의 해석이 분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됨을 증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분석을 넘어 해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해석은 분석과 논리적 관계를 맺는 견고한 결론이 아니라 수많은 해석의 가능성 중 하나가 된다. 즉, 해석은 분석에서 연역된 것이 아니라 해석자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라이틀러는 해석이 분석으로부터 인과적으로 비롯된다고 주장한 에드워드 콘(Edward T. Cone)의 “슈베르트의 약속의 음: 음악해석학의 연습 Schubert’s Promissory Note: An Exercise in Musical hermeneutics”에서 콘이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Op.94> ‘6번’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끌어내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다.

크레이머와 콘의 글에서 드러난 문제는 바로 그 논의들이 허술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음악해석학적 목표가 음악 그 자체에서 비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트라이틀러는 어떤 논리나 해석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으로 음악을 사용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음악해석학은 이와 반대로 음악을 더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주지하여 그는 궁극적으로 음악을 특정한 해석으로 환원시키려는 목적으로 음악에 접근하지 않을 것, 해석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꼭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특정한 입장에서 음악의 의미라고 추정되는 것을 해석 및 규명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여러 사유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편이 음악을 더욱 잘 이해하고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해석학, 성서해석학, 혹은 무엇?”은 음악해석학에 대한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처럼 곳곳에 숨어있는 단서를 차근히 모아가며 음악해석학의 논점들을 상세히 독해하길 요구한다. 트라이틀러는 음악해석학을 둘러싼 맥락과 담론, 분석, 경험 등 폭넓은 범위를 빠르게 횡단함으로써 크레이머와 콘의 논리에 결여된 것은 무엇인지 혹은 어떤 지점에서 순환 논리나 모순에 빠지는지를 명쾌하게 짚어낸다. 궁극적으로 트라이틀러는 음악의 해석이 어떤 본질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가 음악을 해석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핵심적인 것이 사실은 음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HERMENEUTICS, EXEGETICS, OR WHAT?

해석학, 성서해석학, 혹은 다른 무엇?

‘음악해석학’이라는 용어는 수많은 경로로 접근되어왔다. 그러나 그 상공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항로들은 해석학의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전령 헤르메스(Hermes)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모든 행동과 이야기는 표면 아래에 숨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1961년, 손택(Susan Sontag)은 출간 즉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꽤 시들해진 글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를 발표했고, 이 글에서 해석의 파괴적인 목적을 지적했다. 해석이라는 도전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항상 말해지지 않은 의미를 읽어내거나 우리가 ‘권위자’라 부르는 전문 해석자들의 의견을 듣는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채널은 막혔고, 의미의 소통은 정체되어 있다. 뉴욕 우드스탁에 사는 한 친구는 내게 ‘대중 해석학’ 잡지 창간을 제안하기도 했다(꽤 유서 깊은 잡지인 ‘대중 사진’ 혹은 ‘대중 기계’를 모델로 한 것이다).

손택의 예언적 저항은 이제야 시의적절해졌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을 겨냥했을 때, 해석은 작품 전체에서 일련의 요소(X, Y, Z 따위의 요소)를 뽑아내는 것을 뜻한다. 해석의 임무는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번역 작업이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시오, X가 정말 A인 것 – 혹은, 사실상 A를 뜻한다는 것 – 을 모른단 말이오? Y가 사실은 B요, Z가 실은 C라는 것을?

‘해석학’이라는 말의 확산과 최근 음악학 문헌에서도 발견되는 그 파생어들은 음악학 분야에도 이 일종의 문화적 유행이 당도했다는 징후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1장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주목받지 않는 ‘언어로서의 음악’ 개념을 논했다. 최근 몇 년간 화두는 ‘텍스트로서의 음악’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를 보여주는 한 지표는, 이 장의 내용이 원래 2000년 덴마크 오르후스(Aarhus)에서 열린 제13회 북유럽 음악학회의 기조연설이었고, 기획자가 이를 ‘텍스트로서의 음악’ 세션의 첫 순서로 발표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음악해석학에 대한 변론을 담은 로렌스 크레이머의 책 『문화실제로서의 음악』의 첫 번째 장 “비유와 창: 음악해석학의 개요(Tropes and Windows: An Outline of Musical Hermeneutics)”를 살펴봄으로써 음악해석학이 유행하게 된 명백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은 크레이머가 이 글에서 전개해나가는 네 가지 믿음이다.

1. 음악작품은 담론적 의미를 지닌다.
2. 담론적 의미는 깊이, 정밀함, 텍스트 해석과 문화적 실제의 밀도 면에서 비판적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다.
3. 이러한 의미들은 ‘음악외적인 것’이 아니며, 음악작품의 형식적 과정과 양식적 표현과 불가분하다.
4. 이러한 의미들은 문화의 연속적인 생산 및 재생산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다.

이중 앞의 세 항목은 음악해석학의 주된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세 번째 믿음의 허술함은,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전문가들의 논의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논의를 다른 이상한 길로 빠지게 하는 단연 위험한 요인이다. 이는 콘(Eduard T. Cone)의 글 “슈베르트의 약속의 음(Promissory Note): 음악해석학에 관한 에세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콘의 이 글은 1900년대 초 가장 먼저 ‘음악해석학’이라는 말을 쓴 헤르만 크레츠슈마르(Hermann Kretzschmar)의 음악해석학 관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콘의 글도 우리가 앞으로 차근히 되짚어볼 주제 중 하나다.

 

(후략)

 

전문:『그래도 우리는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음악의 연주, 분석, 작품의 해석』(음악세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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