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포화된 청취 공간으로서의《호버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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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버링>의 세계를 떠돌던 소리들을 호명해보자. 물소리, 기차 소리, 최초로 녹음된 에디슨의 노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존 케이지의 4분 33초, 루이지 루솔로의 소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던 죠하프 소리, 4층을 짓누르던 무거운 소리들을 1층에 같은 볼륨으로 전송하며 1층과 4층을 동기화하는 일종의 트랩 사운드, 그리고 이 모든 소리에 앞서 2/W의 문을 열자마자 전면에서 튀어나온 하쉬 노이즈까지, 사방에서 듣기를 종용하던 제각각의 소리들. 8명의 작가가 내놓은 총 78개의 작업이 한데 얽혀 “망가진 쇼룸 같은 풍경”을 연출한 전시 <호버링>에서 ‘소리’는 그 혼란스러움을 증폭하는 데 크게 기여한 매체였다.

소리가 전시된 사례, 소리나 음악을 소재로 삼은 미술가, 음악이라 불러도 무관할 만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미술관 등 소리와 관계된 미술의 사례가 상당히 누적된 오늘날, 소리 매체에 대한 미술의 낯섦은 상당 부분 해소된 듯하다. 미술이 다뤄내는 매체의 범주가 여전히 확장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소리는 외려 미술 안에서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닌 꽤 굵직한 매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호버링>에서 두 명의 작가 김동용과 서민우가 소리에 집중하는 작업을 전시했다는 사실은 뭔가 어긋났다거나 생경하다기보다는 이제는 응당 그럴만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소리를 미술의 영역에 포섭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주저함도 의구심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소리를 다루는 ‘방식’이다. 미술관이라는 곳이 귀보다는 눈을 위한 공간으로 구축되어온 만큼, 이곳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의 규율들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 기본적으로 미술관은 조용한 곳이고 사람들은 그 관습에 맞게 공간과 작업과 신체와 행동을 구축하고, 보는 행위에 최대한으로 집중한다. 이 은근한 규율은 소리를 이용하는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소위 ‘사운드 작업’이라 불리는 것들은 다른 작업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설치되고, 기획자들은 소리의 시공이 다른 작업과 중첩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분리 장치를 마련한다. 생각해보자. 미술관에 진입하자마자 무언가를 들은 적이 있는지, 혹은 듣느라 보지 못한 적이 있는지. 눈의 논리가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미술관에서 사운드는 대체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무력해지는 편이다.

2.

“시청각 지옥”이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는 전시 <호버링>에서 소리는 이전처럼 호락호락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의도된 상황은 아니었다. 전시 준비단계에서 기획팀은 서민우에게 “독립적인 사운드 작업인 동시에 일종의 공간음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작업을 요청했다고 한다. 소리를 어딘가에 유배하지 않은 채 공간 전체에 재생하겠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배경음으로 오인될 수 있을 만한 기능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 요청은 작업의 무게를 조금 줄여달라는 말로 이해될 가능성도 충분했다. 서민우는 우선 그 제안을 받아들여 ‘폐허의 이미지’를 환기한다고 여겨지는 데다가 몰입할 만한 청취의 대상에서 손쉽게 탈락하곤 하는 ‘노이즈’를 선택해 이를 기반으로 여러 소리가 뒤섞인 10분 길이의 리믹스 <Sound Sculpture Practice/bajawoo remix>를 만들었고 1층 전역에 재생했다. 하지만 으레 공간음에 기대할만한 볼륨 이상으로 재생한다는 전략을 선택해 그 제안을 뒤엎었다. 아마 문을 열고 들어가 전시장에 진입한 첫 순간, 입구 가장 가까이에 놓인 오연진의 프린트 작업 <Trade-off>에 미처 제대로 시선을 두기도 전에, 관객은 가장 먼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후략)

전문:『호버링 텍스트』(미디어버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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