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집어먹고 나오는 기쁨: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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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집어먹고 나오는 기쁨 –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의 대화

청년 황병기가 스승 김죽파에게 어떤 것이 가장 슬픈 음악이냐고 물었다. 김죽파는 조용히 앉아있다가 남도 민요 흥타령이라 답했다. 스승은 그 음악이 바위에다 머리를 짓이겨서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다고 했다. 한을 물었더니 흥이라 답한 스승의 이 역설적인 대답은 오늘날 황병기의 마음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황병기는 늘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음악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병기는 그 슬픔이 다름 아닌 기쁨의 극치라고 말한다. 모든 기쁜 것은 굉장한 슬픔을 머금고 있다. ‘슬픔을 집어먹고 나오는 기쁨’. 지금, 황병기의 음악이 그리려 하는 마음이다.

그저 가야금 소리가 좋아 줄을 타기 시작했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악기를 놓지 않았다. 줄을 고르고 멋과 고즈넉한 여음을 만들어나가길 십수 년, 산조와 정악, 연주와 작곡, 국악과 현대음악이라는 두 갈래를 넘어 황병기는 가야금 명인이자 진정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국악을 창작하는 인물이 되었다. 2016년 12월 20일, 작곡과의 이신우 교수가 황병기를 찾았다.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고, 여전히 그가 걷는 길의 방향을 물었다. 연주, 창작, 교육 등 많은 영역에 헌신해온 그이다. 황병기에겐 자연스러운 걸음이었으나, 그가 남긴 궤적은 한국 음악사의 한 축이자 우리가 따라야 할 정도(正道)가 되었다.

분리된 두 세계를 엮어내는 음악

돌이켜보면 황병기의 행보는 분리되어 있던 두 세계를 고루 엮어서 최고의 경지를 끌어내는 식이었다. 국립국악원이 설립된 1951년, 가야금을 타기 시작한 황병기는 간단한 민요 가락을 배운 뒤 전통 정간보를 통해 김영윤에게 정악을, 김윤덕에게 산조를 배웠다. 이후 성금연, 김죽파, 신쾌동, 한갑득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산조를 배우며 여러 유파를 손에 익혔다. 정악과 산조를 함께 배우는 것은 황병기 이전까지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즉 황병기는 공식적으로 정악과 산조를 각각 최고의 명인들에게 배우고 둘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연주할 수 있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정악과 산조의 만남에서 멈추지 않는다. 60년대에 이르러 황병기는 연주를 넘어 창작을 시작한다. 황병기가 늘 말하듯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고 옛것만 굳어진다면 골동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국악에 정통했던 황병기에게 새로운 음악을 창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통과 새로움 사이의 아주 세밀한 조율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틀을 부수기도 해야겠지만 전통을 놓치면 허망하기 때문에 허망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전통을 벗어났다”. 그의 이런 생각은 산조와 정악의 특성을 한 곡 안에서 융합한 작품이나 “산조이지만 산조가 아닌” 곡으로, 국악과 현대음악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는 음악으로 구현되기도 했다. 전통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통에서 벗어나고, 국악이면서 현대음악인 음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에게 전통과 새로움이란 어떤 것이고, 그는 이를 어떻게 다루는 것일까.

법률(法律)의 ‘율’은 ‘음악 율’

황병기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때도 법과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한평생 가야금을 타온 그가 음악이 아니라 법을 전공했다는 점은 그의 음악을 논할 때 늘 회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법과 음악은 일견 멀어 보이지만, 그가 법대에서 배운 “법학적 사고방식”은 그에게 실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중요한 전통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체계를 정밀하게 변화시키며 새로움을 조심스레 녹여내는 황병기의 음악세계는 바로 이 사고방식과 맞닿아있는 듯하다.

전통과 새로움, 연주와 창작, 국악과 현대음악의 사이에서 그가 느꼈던 고민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은 “옛 음악어법을 배우고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역설적이지만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법을 배우고, 그 법의 토대가 되는 사고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황병기는 법의 근본 원리를 파악하는 법철학 같은 분야가 음악적 아름다움의 본질을 탐구하는 음악미학과 통한다고 지목한다. 전통과 새로움, 동양과 서양의 간극 안에서 황병기가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낼 수 있게 한 근간은 바로 전통이라는 단단한 땅과 음악의 ‘법’과 ‘본질’을 꿰뚫는 그의 시선일 것이다.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연한 기회로 듣게 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황병기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강렬함을 안겨주었다. 이후 《봄의 제전》에 완전히 빠진 그는 여러 장의 음반은 물론 악보까지 두 종류를 구비할 정도로 이 곡을 탐독했다. 이를 시작으로 황병기는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불레즈(Pierre Boulez), 노노(Luigi Nono), 케이지(John Cage) 등 서양의 현대음악에 깊게 심취했고, 자연스레 동시대와도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백남준과는 1968년 뉴욕에서의 첫 만남 이후 여러 차례 만나며 함께 협업하기도 했고, 1974년부터는 윤이상과의 인연이 시작되어 1990년 평양의 ‘범민족통일음악회’, 이후 도쿄의 ‘통일음악회’ 등에 참여하며 여러 번 만났다. 백남준, 윤이상과의 교류는 강석희, 백병동 등 같은 세대의 현대음악 작곡가들과도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혁신적인 작품을 탐구하고 걸출한 예술가들과 동시대를 함께 호흡했음에도 불구하고 황병기는 이에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그가 서양 현대음악에서 배운 것은 그 음악 자체나 구체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타인의 음악을 모방하지 말 것”이라는 작곡 정신, 그리고 가야금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연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배운 것은 음악어법 그 이면에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 즉 율(律)이었다.

황병기의 음악은 산조와 정악, 국악과 현대음악에 모두 맞닿아있지만 그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다. ‘국악’ 혹은 ‘현대음악’이라는 하나의 제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분명히 전통적이면서도 새롭다. 스승도 없었고, 선배도 없었다. 완벽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들은 황병기만의 공력이 깊게 밴 ‘고전’이 되었다.

국가적 경계를 넘어

황병기 음악의 깊이와 진수를 알아본 것은 비단 한국의 청중만이 아니었다. 64년 일본, 65년 하와이를 시작으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보스턴, 암스테르담, 베를린, 뮌헨, 빈, 파리, 베네치아, 본, 제네바 등 황병기의 음악은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 세계의 청중과 만났다. 황병기 역시 자신의 음악이 더 멀리 확장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것은 ‘세계적인 음악’이 아니었다. 그에게 세계적인 음악을 만들겠다는 말은 그에게 허황된 것처럼 보였다. 그가 상상한 것은 일본, 인도, 이란 등의 청중이 자신의 음악처럼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범아시아적인 음악’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병기의 음악은 세계 속에서 연주되고 있다. 황병기는 세계의 청중들이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가 “애당초 좋아할 사람들이 듣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라고 담담히 말하지만, 그 음악이 이미 ‘범아시아’ 그 이상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혀 일면식이 없는 독일의 아티스트가 황병기의 산조에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고, 그의 첫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미국의 한 잡지에서는 그 음악이 ‘하이스피드 시대의 현대인의 정신을 해독시켜준다’는 예리한 평으로 화답했다. 먼 타지에서 들려온 그 말은 유달리 그에게 깊게 다가왔다.

아름다움과 선을 다한 음악

“정신을 해독시키고 영혼을 위로하는 것”, 이제까지 황병기의 음악이 추구해온 주된 흐름이다. 황병기는 『논어 백가락』에서 공자의 한 일화를 소개한다. 제나라에서 공자가 ‘소’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의 뛰어난 경지에 감탄하여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잃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식욕마저 잃게 한 ‘소’ 음악에 대해 공자는 ‘아름다움도 다했고 선함도 다했다’고 말했다. 황병기는 이 일화와 함께 바흐, 사라사테 등 여러 음악가를 언급하며 귀로 듣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영혼에 다가오는 정성 어린 음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아름다움과 선을 다한 음악’은 다름 아닌 황병기가 추구하는 음악, 즉 아름다우면서도 사람의 영혼을 쓰다듬을 수 있는 음악인 듯하다.

그리고 지금, 황병기는 평생에 걸쳐서 늘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곡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왜 슬픔을 이야기하는지 물었다. 그가 답했다. “굉장히 아름다운 것은 슬픔을 머금고 있다.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 바로 그렇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운동하는 사람들로서는 최고의, 극치의 일임에도 전부 운다. 남북 이산가족도 만날 때 다 운다. 왜 우느냐, 실제로 슬퍼서 우는 거다. 그 슬픔은, 그러한 슬픔까지도 집어먹고 나오는 기쁨이다. 굉장한 기쁨. 그러면 왜 우냐면, 슬퍼서 운다. 그 기쁨은 슬픔을 이미 집어먹고 나온다. 나는 그러한 것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떤 슬픈 마음이 차고 넘쳐서 결국엔 기쁨이 되고야 말고, 영혼을 쓰다듬을 수 있는 깊은 감정이 깃든 음악이 바로 아름다우면서도 선한 음악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깊이의 고민을 요한다. 황병기가 즐겨 표현하듯,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로 구멍을 뚫을 정도’의 불가능한 작업과정을 거쳐야 그가 바라는 작품다운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음악에서 그러한 깊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국악기와 서양악기의 고민 없는 접목 또한 황병기에게는 그저 얕게 느껴진다. 그는 “음식을 먹을 때도 퓨전 음식이 많지만 무슨 음식이든 진짜배기 음식을 먹고 싶지, 적당히 만들고 섞어서 대중들의 입맛에 맞춘 것은 먹기 싫다. 그것처럼 서양음악과 국악기를 엮어서 쉽게 만들어낸 음악은 듣기 싫을 뿐 아니라 구역질이 난다”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분명히 진정으로 훌륭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깊고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 황병기는 결코 쉽게 성취될 수 없는 뛰어난 경지의 음악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만큼 음악의 힘을 믿는다.

 

‘울림’에게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후배인 우리는 앞으로 어떤 울림을 청중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 황병기는 다시 한번 영혼을 쓰다듬는 음악에 대해 말한다. “나에게 딱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 인생을 오락을 위해 바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영혼을 쓰다듬으면서도 몹시 아름답고, 가능한 한 슬픈 음악을 만들려고 한다. 내 후배들도 그렇게 노력을 해줬으면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서울대학교 음대소식지 울림 Vol.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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