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of Today, Memory of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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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음악, 내일의 기억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신년가족음악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

내겐 아주 오래된 음악적 기억들이 몇가지 남아있다. 여섯 살 즈음에 김흥국의 호랑나비에 맞춰 엄마와 함께 춤을 췄던 기억, 여덟 살 무렵 서울 리틀엔젤스 예술회관(현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RV 356 을 들었던 기억, 그리고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누군가 아빠에게 선물해줬던 말러의 교향곡 7번 CD를 낮잠자다가 들었던 기억이다. 들을 땐 이게 누구의 무슨 곡인지 전혀 몰랐다. 열 살도 채 안된 꼬마에게 그런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지만 그 음악들은 내 감각의 일부가 되었다. 다시 그 음악들을 들었을 때 호랑나비의 그 들썩이는 리듬,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의 날카롭기도 한 그 쾌청한 음색, 말러의 화음들과 그 꼴라주같은 구조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바랜 옛 사진처럼 그리움마저 느낄 정도로 내밀한 인상을 주었다. 어린 나의 오래된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어렸던 나는 훌쩍 1990년대의 음악에서 1710년대로, 또 1900년대의 음악으로 옮겨다닐 수 있었다. 나중에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는 그 음악과 나 사이의 멀디 먼 시간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2015년 2월 7일 토요일 오후 4시, 밝은 대낮에 아이들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을 찾았다. 여느 음악회처럼 해가 질 무렵에야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광경과는 사뭇 달랐다. 로비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른들의 웅웅대는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아닌 직선적인 아이들의 목소리와 꺄르르대는 웃음소리였다. 공연에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의 절반 이상이 아이들 관객이었다.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신년가족음악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는 보통 음악회장에 출입을 꺼리는 어린 아이들을 초대했다. 레파토리도 두 개의 동화, 용감한 꼬마 재봉사(L’Histoire de Petit Tailleur, 1937)와 십이간지 동화이야기(Twelve Animals of Asian Zodiac for Chamber Orchestra and Narration, 2015)로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동화였다. 첫 곡의 작곡가는 헝가리의 티보르 하르샤니(Tibor Harsanyi), 두 번째 곡의 작곡가는 화음쳄버오케스트라의 전속작곡가인 최한별(Hannah Hanbiel Choi)이었다.

두 곡의 편성은 모두 쳄버오케스트라와 나레이션으로 이뤄졌으며 음악은 극을 더욱 재밌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마치 음악과 함께 구연동화를 듣는 것처럼 음악과 나레이션은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했다. 첫 곡이었던 하르샤니의 ‘용감한 꼬마 재봉사’는 상당히 친숙한 방식의 음악을 보여줬다. 우리가 동화애니메이션을 들을 때 많이 듣던 음악들, 이를테면 디즈니의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요술봉소리, 주인공이 기발한 재치로 주인공을 골탕먹이려하는 나쁜 왕을 물리칠 때 응당 나오곤 하던 유머러스한 관악기 소리들 등이다. 꼬마 재봉사가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멧돼지와, 거인, 유니콘을 물리치고 공주와 결혼해 결국 왕이된다는 이야기는 디즈니 류의 애니메이션에서 상당히 많이 보아왔던 익숙한 형태의 이야기다. 동화다운 동화와 동화음악다운 동화음악, 찬찬히 잘 따라갈 수 있는 공연의 첫 순서였다.

두 번째 곡이자 공연의 타이틀이기도 했던 최한별의 위촉초연작 ‘십이간지 동화이야기’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2015년에 작곡된 진정 ‘오늘날의 음악’인 이 작품에는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반영하려는 목표의식이 담겨있었다. 디즈니에서는 쓰지 않을 것 같은 음악들이 이야기와 함께 흘러나왔다. 약간은 어두운 현의 마찰음, 부딪히는 화음, 마냥 달콤하지 않은 선율들. (물론 십이간지 이야기는 사랑에 빠진 공주와 왕자이야기가 아니긴 하다.) 귀엽게 캐릭터화된 동물들의 과장된 행동을 묘사하는 음악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동물들을 묘사한 것 같다는 점도 상당히 좋았다. 그 과정에서 지난 20세기를 버텨온 소리들이 조심스럽게 쓰였다. 동시대 음악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큰 놀라움 없이 들을 수 있지만, 동화와 함께는 잘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이었다. 뽀로로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듣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의 음악은 조금 다른 음악경험이었을 것이다.

동시대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내게 특별하고 귀중한 경험이다. 우리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음악적 경험은 계속 쌓여간다. 20세기를 지나왔고, 15년이 더 지났다. 쌓여가는 시간만큼 과거는 거대해지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가끔은 아직 과거를 다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현재로 내몰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우리가 음악을 듣는 순간은 오늘이다. 거대한 음악의 역사가 내 등을 현재로 떠미는 것과 달리 최한별의 ‘동시대인으로서’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말은 나를 순식간에 오늘, 지금, 여기로 데려와준다. 최한별의 그 소망이 음악으로 잘 구현되었는지를 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공연에서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우리의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 만들고, 연주한 음악을 지금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장르화된 “현대음악”의 고전을 듣는 게 아니라 정말 현 시점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

이 공연에 찾아왔던 아이들은 이렇게 동시대의 음악을 마음속에 쌓아간다. 내가 어렸을 적 들었던 음악들의 요소 하나하나를 내밀한 것으로 간직한 만큼, 이 소리들을 마음에 고스란히 담을 것이다. 어떤 불협화음을 들으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날 이 공연의 기억을 돌이켜보며 어떤 달콤한 그리움을 느낄 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은 오늘의 음악을 듣는 흔치 않는 기회를 얻었다. 이 아이들은 앞으로 무얼 듣고 자라날까. 어쩌면 이 공연에 다녀간 아이들은 동시대 음악을 막연히 ‘무서운 음악’, ‘공포영화에 나올 것 같은 음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현대음악”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말을 더이상 쓰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그 음악들을 부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은 여전히 MTV를 보고 랩을 읊으며 유튜브로 베토벤을 들으면서도, 그 옛날 쇤베르크가 말했던 것처럼 쇤베르크의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흥얼거릴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