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 Musik zum Lesen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
– 슈네벨(Dieter Schnebel)의 ‘모-노, 읽기 위한 음악’(MO-NO, Musik zum Lesen)

 

1. 읽기에의 권유

음악을 듣는다. 책을 읽는다. 소리를 듣는다. 악보를 읽는다. 그리고 ‘음악을 읽는다’.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음악에 대한 정의는 아마도 ‘음이라는 소리를 전제로 하는 요소를 통해 구성된 시간예술’일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즐기는 음악이라 불리는 것들을 생각해봤을 때 이 정의에 불충분하거나 과한 설명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음악을 ‘듣는다’고 말해왔다.

약 3cm 두께의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한 권의 책이 있다. 책 표지에는 MO-NO, Musik zum Lesen(모-노, 읽기 위한 음악)이라고 쓰여 있다. 책을 펼치면 für Hörer(청자를 위하여)라고 써져있는 페이지가 등장한다. 한 페이지를 더 넘기면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악보의 발췌본이 나타난다. 한 페이지를 더 넘겨본다. 슈베르트의 악보에게 고하는 듯한, ‘end’ 라는 단어가 쓰여 있고,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은 텍스트, 그리고 직선, 곡선 등 그래픽 기보라 불릴 수도 있는 어떤 도판들이다. 계속해서 넘겨본다. 이 책의 약 90퍼센트는 음악에 관한 짤막한 텍스트들과 음표 등 음악기호로 구성된 그래픽 기보로 이루어져있고, 그 나머지는 오선보로 기보된 악보 발췌본, 사진, 잭슨 폴록의 그림 등이 페이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층위에서 개념적 혼란을 가져온다. 첫째로 음악이라고 규정지었으나 작품은 소리가 아닌 책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둘째로 책의 형태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읽기라는 방법을 제시하게 되는데 역시 읽는 대상은 음악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 셋째로 책 안의 내용들이 우리가 보통 ‘읽는다’고 말하는 글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고 따라서 책이라는 매체와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성질이 기존의 것과 다르다는 것, 넷째로 내용들이 통일된 매체를 통해 표현되지 않고 각각 다른 매체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적 혼란은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계속해서 중첩되며 이 작품이 대체 어떤 매체에 속한 것이고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케케묵은, 그리고 수많은 답이 존재하는 그 물음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나 첫 줄에 작품제목을 기입하던 순간, 문제가 생겼다. 이 제목을 단행본을 표시하는 『』괄호 안에 넣을 것인가, 혹은 음악 작품 제목을 표시하는 《》괄호 안에 넣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2. 지시와 표현의 경계로서의 악보

문제는 이 작품이 선택한 매체인 ‘책’에서 드러나는 청각성의 배제와 시각성의 대두에 있다. 이 작품을 음악을 둘러싸고 있던 이전의 논의들과 가장 가까운 지점부터 살펴보자. ‘모-노’가 음악과 관련된 혹은 음악이라 주장하는 다양한 ‘시각적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이전의 악보와 가까운 지점에 위치할 것이다. 악보를 완벽히 정의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악보를 기준으로 정의해보자면 ‘음악의 곡조를 일정한 기호를 써서 기록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악보는 단순히 수동적인 기록물로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음악의 개념과 함께 상호작용하는 요소로서 존재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소리라는 매체를 시각상징으로 기호화시켜 물질성을 갖게 된 악보는 리디아 괴어의 논의에 등장하는 음악 ‘작품’개념 형성에 관여한 주요한 협력자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20세기 경 주요한 음악사의 흐름 중 하나로 설명되는 ‘탈결정론적 작품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연성음악’은 오선보가 가진 개념으로 표시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이러한 음악들은 그래픽 기보, 텍스트 지시어로만 쓰인 악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현대에 접어들며 음악사에서 펼쳐졌던 수많은 안티테제와 변형, 변주들은 음악의 내용 뿐만 아니라 음악의 매체까지 변화시켰고, 음악을 접하게하는 하나의 창으로 기능했던 악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악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보 또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었고, 가능해진 것은 정의가 아닌 분류였다. 서양음악사라 불리는 서유럽 중심의 음악사의 진행양상과 그 맥을 가장 가까이 하는 것은 헬가 드 라 모트 하버의 분류이다. 헬가 드 라 모트-하버는 기보를 4가지 요소로 분류한다.

(헬가 드 라 모트-하버의 기보분류)

분석적

시각적

상징적

관조적

음악문자

음악그림

정밀한 기보양식/결과적 음향의 기록

그래픽 기보/음악 그래픽

표의 좌측면이 오선보의 성격, 우측면에 속하는 것이 그래픽 기보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오선보는 언어적 성격이 강한 기보방식이었고 그래픽 기보는 회화적 성격이 강한 기보방식이다. 따라서 그래픽 기보는 보다 불확정적이며 자연스럽게 그 기보는 우리가 한 작품이라고 부르던 소리덩어리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오선보와 개념상 대척점에 있는 그래픽 기보가 가져온 기표와 기의의 역전을 서우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음이 상징적 의미를 대신하는 경우, 기표인 음은 의미를 대신하고 있으며 음을 통해 그 상징적인 의미가 해석되어야 하는 데에 반해 비결정성의 기보는 시각적 형태가 음을 상징하고 있으며 시각적인 형태가 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상징적인 의미 부여의 경우 현전하는 것은 음이고 부재하는 것은 상징적 의미이지만 불확정적 기보의 경우 현전하는 것은 시각적 도형이고 부재하는 것은 음이다. 전자의 경우 상징적인 의미를 시각적인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두 경우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이 해석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해석의 내용의 역전 즉 기표와 기의의 역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오선보에서의 기표(음)와 기의(상징적 의미), 그리고 그래픽 기보에서 역전되어 등장하는 기표(상징적 의미)와 기의(음)의 관계임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의 자리는 연주라는 축을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논의를 확장시켜서 인용문에서 상징적 의미와 음이라는 세부적 요소로 설명되고 있는 기표의 자리에 ‘악보’를, 기의의 자리에 ‘연주’를 놓아보자. 이 관점에서 ‘기표와 기의의 역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면, 아무것도 역전된 것이 없다. 그래픽 기보 또한 이전의 악보가 해내왔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역전’이라는 키워드를 차치하고서라도 큰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없다. 이 관점을 중심으로 봤을 때 기표와 기의의 역전이 부각되어 나타나는 지점은 그래픽 기보가 아닌, 위의 분류 중 우측 마지막 항목에 있었던 ‘음악 그래픽’이다. 그래픽 기보의 개념에서는 앞의 ‘그래픽’이 명사인 기보를 수식한다. 따라서 그래픽은 내용이 표현된 방법일 뿐 기보라는 본질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 그래픽에서는 그 반대이다. 음악이 내용이 되고 그것이 그래픽이라는 매체로 표현된 것임을 뜻한다. 음악의 내용이 무엇인지 본 분류에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음악 혹은 음악적인 것이 그래픽적으로 나타내는 대상이 되고, 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매체는 그래픽이다. 중요해지는 것은 악보가 가지고 있던 표면적인 그래픽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음악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짐작에는 간단한 사실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테면 ‘모-노’의 창작자인 디터 슈네벨이 디자이너나 화가가 아닌 작곡가라는 점, 그리고 제목이 읽기 위한 ‘악보’가 아닌 읽기 위한 ‘음악’이라는 점 등이다.

아주 엄밀히 그 도판(혹은 악보)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래픽 기보와 음악 그래픽의 경계점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시각적 결과물을 단순히 ‘보고’ 그것이 음악 그래픽인지 그래픽 기보인지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더러 음악 그래픽이 악보로 읽힐 수 없다는 명확한 근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분에 대해서는 시각적 결과물의 본질적 측면, 즉 창작자의 입장과 직접 그 시각적 결과물을 맞닥뜨리게되는 수용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음악 그래픽이 되기 위해서는 각 작품에 따라 여러가지 특수한 맥락과 의도, 감상의 방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음악 그래픽은 ‘음악적 행동에 대한 지시’로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래픽적으로 ‘표현된 그 자체’로 이중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다소 멀리 돌아왔지만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보자. ‘모-노’는 수많은 그래픽 기보의 예들과 마찬가지로 연주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읽기’라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본다면’모-노’의 외피는 그래픽 기보로 읽힐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음악 그래픽에 속할 수 있다. 들릴 수 있으나, 읽히기를 원하고 있다. ‘모-노’가 연주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악보라는 열린 개념에 있어 악보를 쓰는 기보자 입장과 악보를 읽는 해석자 입장 각각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규정짓기와 자유로운 해석이라는 두 극단적 지점에선 그 어떤 것도 악보로 인식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악보이다, 아니다 이 두 가지 말로 완벽히 설명될 수 없다. ‘모-노’는 지시로서의 악보로 여겨질 수 있으나 표현으로서의 악보(혹은 그림)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악보가 ‘음악의 곡조를 일정한 기호를 써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벗어나 ‘음악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매체라는 것으로 정의를 확장시킨다면 ‘모-노’를 표현으로서의 ‘악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창작자만큼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수용자의 입장을 다시 보자. 악보는 ‘연주의 지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시성이 삭제되면서 수용자는 악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변화시키게 된다. 우리는 낯선 것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우선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있던 유사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모-노’도 수용자로 하여금 그들의 음악적 경험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음악을 들었던 기억, 연주의 경험, 좋아하는 선율에 대해 생각한다던가, 음악회에 참석했던 경험 등을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혹은 ‘아는 만큼 들린다’ 는 말마따나 수용자 개개인들은 이 작품을 각각 다르게 감상할 것이다. 그러나 우선 이 작품이 개개인에게 감상되어질 때 생겨나는 공통의 키워드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음악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나 ‘모-노’는 감상자들에게 경험과 기억을 환기하는 매개로 작용할 것이다.

‘읽기 위한 음악’이라는 제목은 작품이 수용자의 감상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제목을 ‘음악’이라고만 했어도 어쩌면 감상자들은 그것을 ‘읽기 위한 음악’이라고 제목붙인 작품과 유사하게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책으로 음악을 기록해 놓은 것을 보통 ‘악보’라고 부르지 ‘음악’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읽기 위한 음악’이라는 명칭은 창작자의 아이디어가 작품 창작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되느냐’에까지 미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에 덧붙여 ‘MO-NO’라는 단어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단선적인’, ‘일방향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MONO’라는 단어는 ‘작곡가-기보-연주-감상’의 복잡하고 전문성을 요하는 매커니즘을 거쳐왔던 서양음악과 다르게 ‘작품-독자’의 직접적인, 매개가 없는 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있지 않을까. 또한 읽기라는 방법의 전제가 될 ‘책’이라는 매체에 대해 다시 주목해보자. 매체는 그 내용을 그 매체를 감상하는 방식으로 접하게끔 한다. ‘모-노’는 명백히 책의 형태로 되어있고 감상자들은 이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야 ‘모-노’의 내용을 감상할 수 있다. 책을 감상하는 방식에서 수백 년간 지배적이었던 감상방법은 읽기였고 이는 상연이나 공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책이라는 매체에서는 책 자체가 어떤 행동을 위한 지시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완결된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 것이다. 따라서 책이라는 물질로서 제시된 ‘모-노’는 그 매체의 속성에 힘입어 그 자체가 대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각 페이지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와 책이라는 매체의 특성, 그리고 규정지음에 의해 ‘모-노’는 지시로서의 악보와 표현으로서의 악보의 경계에 위치하며 이러한 모호성은 수용자로 하여금 ‘모-노’를 ‘기표’, ‘기의’, 혹은 ‘기표와 기의 사이’로 자유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3.시각적 매체에 담긴 시간적 내용들

‘모-노’를 기존의 음악적 개념들 중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연결시켜보자. 앞서 ‘모-노’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청각성의 배제에 대해 논했었다. 음악에 대한 정의 중 핵심적 요소를 차지했던 다른 요소 ‘소리’가 있다. 소리 없는 음악, 이것은 음악일 수 있을까. 음악의 시간성에 주목했던 현대의 작곡가들이 있다. ‘소리 없는 음악’이라고 가장 널리 알려져있을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는 음악적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서 소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았지만 4분 33초라는 시간 안에 그 작품개념을 위치시킴으로써 음악작품의 시간성에 대해 사고하게 한다. 또한 패르트(Arvo Pärt)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도 소리가 없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을 작품 안에 다수 배치함으로써 소리나는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소리나지 않는 것 또한 강조한다. 이 두 작품의 특징은, 작품이 연주되는 시간 속에 악음들이 가득 차있지 않다는 것이다. 음악적인 소리들로 차있지 않아도, 음악적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 있다면, 그 안의 모든 것이 악음으로 빽빽이 차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다소 지엽적 예이긴 하지만, 현대 이전의 음악들에서 효과적인 관현악법으로 쓰인 전휴지(General Pause)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분명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의 일부이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음악적 시간의 ʻ연속성ʼ이다.

한 권의 소설책을 읽는다고 생각을 해보자. 양 손에 책을 잡고 한 장, 또 한 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나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을 때, 이 책을 읽는 데 필요했던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연속적인 시간이다. 각각의 페이지들이 각 페이지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아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각각 다 달랐을지언정 하나의 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책을 볼 때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를 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책을 읽는 행위도 음악처럼 ʻ연속적인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 하나의 음악작품을 단편적인 한 페이지나 한 프레이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로써 인식한다.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데 시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문학을 각각 작품으로 접근하게 될 때는 마치 그림처럼, 하나의 ‘전체적 이미지’로써 여기게 된다. 수많은 음다발, 언어다발들이 한 작품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작품이 연속적 시간을 전제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디터 슈네벨의 읽기 위한 음악을 읽는 장면도 상상해보자. 책을 펼치면 첫 페이지엔 작품의 제목과 출판년도, 출판사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가 나오고, 그 뒤로는 MO-NO라고만 쓰여져 있는 페이지가 나온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엔 für Hörer (for listener)라고 쓰여져 있고 그 다음장에, 바로 슈베르트의 악보가 나온다. 오선보를 능숙하게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악보만 보고 소리를 상상해내는 내청이 가능할 것이다. 읽기 위한 ʻ음악ʼ 이라고 규정지음으로서 이 책을 감상할 때 음악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사고하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완연한 클래식인 슈베르트의 악보를 작품의 첫 시작에 놓음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음악이 시작되게 만든 것이다. 시간적인 면에서 음악과 차이가 있다면 청각적인 음악과 달리 이 작품은 감상시간을 보다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ʻ연속적ʼ이라는 것이 맞다면, 너무나 명백한 음악, 한 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클래식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이후에 위치할 요소들이 음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든 있지 않아도 음악에서 멀어질지언정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오선보에 익숙한 사람들은 구체적인 음상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며 동시에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적어도 이게 악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소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지라도, 음악에의 끈을 놓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모-노’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문학에서 시간적 내용인 이야기가 ‘책읽기’의 매커니즘을 통해 시각적 매체인 글로, 책으로 나타나는 것과 유사하게 음악에서 시간적 내용인 음악적 내용이-비록 소리는 아니지만- 다양한 시각적 매체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연속적 타임라인’의 존재만으로 음악이다 아니다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모든 시간예술이 음악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악보라는 시각매체가 가져오는 음악과 악보의 경계, 그리고 음악의 근간이 되는 시간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이제, 이 책이라는 껍데기 안에 둘러쌓인 알맹이를 파헤치고자 한다. 이 책 안의 어떤 내용이 ‘음악적’이거나 ‘음악’이냐 하는 것이다.

 

4.하이브리드 컨텐츠

책. 책 속의 글, 책 속의 그림, 책 속의 사진, 책 속의 악보. 많은 시각 매체들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들을 수 없다. 따라서 질문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데 어째서 음악인가? 이 작품 제목에 의하면 이 작품은 책이라는 매체로 전달된 음악이라는 내용이다. 기존의 음악은 어떠했던가. 음악을 매체와 내용으로 쪼갤 수 있을까? 매체는 ‘소리’였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악작품들의 소리를 제거하고 난 뒤에 남은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예술의 내용들을 이루는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내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그 내용은 각각 다양한 매체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내용이 소리라는 매체를 선택해서 음악으로 표현된다면, 캔버스라는 매체를 선택해서 회화로 표현된 것과 분명 같지 않을 것이다. 음악으로 표현할 것을 선택했을 때, 그 이유가 되는 음악만의 어떤 성격이 있을 것이고 이러한 선택은 다른 매체들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음악만의 내용이 되는 것, 음악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시간이 흘러가며 쌓여진 음악개념의 층층을 살펴보는 것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각 개별음악들의 외형이 너무나 다르기에 앞으로 답해보고자 하는 어렴풋한 ‘음악의 내용’ 및 ‘음악적인 것’은 음악의 외피, 즉 소리나는 음의 형식적 구조가 아닌 그 구조에 대한 일종의 근거 혹은 구조의 성질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음악’이라고 지칭하는 것들은 인류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아주 넓은 층위의 음악이 아니라 소위 클래식 문화라 일컬어지는 서유럽 중심의 음악사로부터 파생된 음악개념임을 다시 한번 정확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음악어법이 ‘기능 음조 화성’체계임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체계에서 힌트를 얻고자 한다.  최유준은 그의 책 『음악문화와 감성정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보다 기능 음조 화성이 체계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음악은 일종의 구문론syntax을 갖추게 된다. 즉 일종의 음악적 마침표 V-I로 종결되는 하나의 문장 구조를 갖추게 되며, 그러한 종결이 이뤄지기 전깍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구와 절을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작곡가는 극작가나 소설가와 다름없이 음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청중들로 하여금 연극을 보거나 소설을 읽는 느낌과 다름없이 긴장감 속에서 음악적 사건을 지켜보다가 마지막 해결(종지)를 통해 안도감을 느끼는 ‘극적 체험’을 안겨줄 수 있었다. 이는 서구 근대의 담론화 양식을 지배했던 다음과 같은 ‘메타 담화 meta narrative’의 형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질서가 수립된다 – 질서가 방해받는다 – 질서가 확립된다.’”

결국 음악 또한 극의 형식을 사용해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사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으로 여겨지는 특정 요소들의 ‘해방’이 있어왔다. 역순으로, 결정론적 작품개념으로부터의 해방, 조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성악으로부터의 기악음악의 해방. 성악음악보다 낮게 평가되었던 기악음악이 성악음악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기까지엔 수많은 이유와 역사적 상황들이 있었겠지만 여기서 한가지 이유를 부각시키고 싶다. 오페라 음악에 필요했던 극적 상황 및 작중 인물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묘사하던 ‘음악적 재현’이 교향곡, 협주곡 등 대규모 기악곡 양식들에 자연히 스며들었을 것이란 근거이다. 작곡가는 극작가가 되고, 가수는 배우가 되어야 했으며, 연주자도 또한 ‘드라마틱한’ 연주를 선보여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마도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박혀있는 ‘음악적’이란 것의 개념은 갈등-해결의 구도를 가지는 극적 구조에 그 개념적 시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한 의견을 내보려 한다. 그러나 ‘음악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그것이 극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기반으로 얼마나 다르게 세부적 사항들을 풀어나가느냐 일 것이다.

다시 ‘모-노’로 돌아오자. 그렇다면 이 작품의 컨텐츠들은 어떠한 공통점이 있고, 어떻게 한 작품으로 묶일 수 있는 것인가? 책이라는 매체 안에 내용으로 존재하는 그 페이지들은 또다시 매체와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그 구성요소들이 되는 오선보, 그래픽 기보, 사진, 회화, 텍스트 등 굉장히 다른 매체들이 혼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이들은 모두 시각이라는 요소로 묶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다양한 매체들의 혼합은 슈네벨의 ‘모-노’에서 어떤 점을 시사하는가? 이런 하이브리드 컨텐츠들은 각각의 컨텐츠가 담고있는 매체가 너무나 다양하며 각 페이지마다도 다르기 때문에 ‘관성적 감상’을 방해한다. 개개인의 인식과 음악에 대한 개인적 경험 차에 의해서 각 페이지들을 감상하는 정도와 방식이 모두 달라질 수 있기에 완벽한 분류는 불가능함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상의 방식을 세개의 큰 범주로 나누어보겠다.

첫째, 실제 음가, 음고, 혹은 연주방식 등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악보를 등장시킴으로써 직접적으로 소리 그 자체를 상상하게 하는 방식이 있다. 이 경우 내청이 가능한 사람들은 실제로 음악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며, 혹은 감상했었던 기억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음악과 관련이 있는 문장이나 단어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지칭하는 소리가 없으므로 텍스트만 쓰여 있는 페이지의 해석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대체로 문학에서의 글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어떤 인상을 떠올릴 것이다. 가령, 한 페이지에 ʻganz ruhig(아주 조용히)ʼ라고 쓰여 있으면, 그 의미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것이다. 어떤 감상자들은 누군가가 ‘쉿!’이라고 말한 이후의 상황을 떠올리고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며, 어떤 이는 연주가 끝난 뒤의 고요한 적막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기억이나 기억에서 비롯된 인상을 떠올릴 경우에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감상자에게 남은 ‘심상’이 감각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 예는 이를테면 악상기호에 가까운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그림에 가까운 그래픽 기보로 된 페이지와 사진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래픽 기보로 된 페이지들의 경우에는 아마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 것이다. 시각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그 페이지에서 느껴지는 인상을 받거나 혹은 그래픽 기보에 대해 사전지식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ʻ이것이 만약에 소리가 난다면 어떨까?ʼ라고 어떤 소리이미지들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사진의 내용을 모르는 경우에는 시각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그 페이지를 감상하겠지만, 만약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나 맥락을 알고 있는 경우라면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계속 있어왔던 음악에 대한 기억과 인상들의 연속선상에서 이 사진의 맥락을 파악하려고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될 것이다.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는 것처럼 ‘모-노’의 페이지를 구성하는 다양한 매체를 각각의 방식으로 읽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모-노’에서 ‘관성적 감상’이란 쉽게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매체가 감상자에게 너무나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져서 마치 ‘투명한’것처럼 느껴져 내용에 보다 집중하게 되는 것과 반대로, 다양한 매체가 불규칙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결국 감상하고자 하는 ‘내용’을 인식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매체를 ‘걷어내버리고’ 내용에 보다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사진을 보고 ‘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의도’에 접근하게 되는 보다 본질적인 사유다.

이렇듯 비음악적으로 보이는 ‘하이브리드 컨텐츠’는 오히려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더욱 잘 대답할 수 있게 한다. 음악이란 개념은 다른 예술과 유사하게 ‘열린 개념’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고정된 개념이 아니므로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음악들이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가에 대해 대략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텐데, 이 과정은 음악의 내부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음악 밖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음악적’이라는 말을 쓰는데 과연 어떤 것이 음악적인 것일까? 우리는 음악 그 자체에는 음악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한 사람의 재능이나 때로는 어떤 그림, 영화, 혹은 움직임 등 다양한 상황에 음악적이라는 말을 쓴다. 어쩌면 ‘모-노’의 하이브리드 콘텐츠가 바로 이런 음악적인 내용들의 집합체가 아닐까? 물론 이전까지의 음악개념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연주가 전제되지 않은 본 작품은 분명히 음악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음악의 내용’을 생각해보자. 기능음조성 음악에서 발생하는 갈등-해결의 구도는 긴장-이완의 구도로 바뀌어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통일되지 않은 매체로 구성된 페이지들의 앞 뒤 맥락에서는 갑작스런 이질적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긴장’이 발생할 것이며, 같은 매체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페이지 구간에서는 ‘이완’효과가 있을 것이다. 오선보를 인용한 페이지에서도 특정 음은 딸림화음(Dominant)의 역할을, 특정 음은 으뜸화음(Tonic)의 역할을 할 것이며 그래픽 기보에서도 크게 그려진 음표는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일종의 시각적 악센트로, 음표 없이 그려져 있는 데크레센도(decresc) 기호는 이완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페이지의 구성요소와 페이지간의 맥락에 의해 발생하는 긴장-이완의 구도는 ‘모-노’의 내용이 (이전의) 음악의 내용의 구조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는 주장의 하나의 근거가 된다. 또한 작품의 약 80%를 차지하는 그래픽 기보 페이지와 텍스트 페이지에서 높은 확률로 오선기보법에서 쓰이던 음악기호들이 사용되었고 텍스트의 내용 또한 악상을 표현하는 단어 및 음악적 상황에 대한 묘사글임을 보아도 ‘모-노’의 내용이 음악적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다만, ‘모-노’가 이전의 음악과 같은 매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음악적 내용이 ‘있음’을 전제하고 진행한 이 논의를 끝마치기 전에 잠시 ‘모-노’의 한 페이지와 ‘음악적 내용의 극적 성격’을 관계지어 생각해보자. 이 글의 서두에서 ‘모-노’를 설명하는 간략한 소개글에서 ‘모-노’에 잭슨 폴록의 그림이 인용되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폴록은 우연성 기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비평가들은 그를 평면성(flatness)을 ‘회복’한 작가라고 논하기도 한다. 미술사 상의 여러 변화에 따라 작품에는 소실점, 원근감, 공간감 등 마치 음악에서의 ‘극적 성격’같은 굴곡이 생겨났었다. 그러나 폴록은 선을 ‘무질서’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평면성, 즉 순수한 상태로의 평면시각예술인 회화에 감상자들이 집중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를 관성적 미술 ‘감상’, 음악 ‘감상’에서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순수한 상태의 음악과 미술로의 이행. 어떤 것을 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버림으로써 만들어지는 것. 앞 문단에서 음악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본질적 부분에서 그것이 극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가장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성적으로 음악적이라 부르는 것들이 과연 진실로 순수히 ‘음악적’이었던 것인지는,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야기를 너무도 사랑해서 음으로도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지 않을까.

앞선 논의는 음악적 내용이라는 존재 자체가 있다는 전제 하에 개진되었다. 그러나 만약 음악적 내용이 ‘없다면’? 오선보의 경우, 음이라는 기표가 나타내고자 했던 상징적 내용인 기의가 없다면? 그리고 ‘모-노’의 페이지들이 담고있는 상징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기의가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우리에게 보이는 텅 빈 기표뿐이라면 어떨까. 어쩌면 ‘모-노’는 음악이라는 경험의 확장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음악을 상징하는 기표들을 가지고 어떤 ‘놀이’를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기의가 없다면 제공되지 않은 내용을 감상자들이 자유롭게 짜맞추어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기표에 대응되는 음악적 내용인 기의가 없다면 ‘모-노’는 청취자의 다양한 음악적 경험에 의해 구성되는 ‘음악적 기억’에 대한 ‘콜라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의 기의가 되어 자신만의 작품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감상에 의해 기의가 탄생하여서 비로소 기표-기의의 관계가 완성되는, 내용을 채워가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기의가 감상자에 의해 자유롭게 대응되는 것이라 할 지라도 기표는 고정되어 있다. 창작자인 슈네벨이 제시한 것은 일종의 ‘규칙’으로서의 기표이다. 그 이유는 많은 음악상징 및 음악적 기표에 의해서 ‘나(감상자)는 음악이라는 마당 위에서 논의를 개진하는 것이다’라는 자각이 계속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규칙에 따라 각각 다른 게임을 펼치게 되는 놀이로서의 ‘모-노’. 물론, 각각의 기표에 각자의 기억을 대입시킬 수 있는 ‘자유’가 감상자에게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적 내용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선택 또한 감상자에게 맡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놀이이냐, 해석이냐, 그것 ‘또한’ 문제로다.

 

5.소리를 벗어나 펼쳐지는 음악의 시간

다시 질문해보자. ‘모-노’라는 음악작품이 존재하는 이 시점에 음악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 것인가? ‘모-노’는 책이라는 매체에 시각을 필요로하는 읽기라는 방법을 통해 음악을 읽는 작품이다. 이는 기존의 악보의 영역과 역할을 모호하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청취의 과정을 생략시켰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연주자가 없고 오직 감상자와 ‘모-노’ 둘만 존재할 뿐이다. 이 작품은 우연성 음악이 가졌던 음악작품의 비규정성을 넘어서 청취과정을 아예 생략하여 연주자가 아닌 감상자에게 감상에 관한 모든 자유를 주었다. 청취를 생략한다고 함은 기존의 음악작품들이 사용하던 지배적인 매체 ‘소리’에서 벗어나 소리 이면에 존재하던 음악의 내용을 해방시키고, 동시에 감상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작품을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노’를 통해서 감상자들은 보다 순수한 상태의 음악의 내용을 접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내용이 되는 각각의 페이지들은 또다시 각각의 매체와 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런 매체의 혼합적 사용은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한 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음악적인 사진’ 혹은 ‘음악적인 그림’으로 국한될 수도 있는 각각의 페이지들은 ‘모-노’ 작품 전체와 같이 음악적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매체로 표현된 음악’으로 기능한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중요한 키워드로 기능하는 것은 이를 음악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수용자의 해석행위에 따른다는 것이다. 수용적 측면에서 발생되는 각자의 음악적 기억과 음악적 경험이라는 요소, 그리고 텍스트나 악보 등의 음악적 콘텐츠들은 음악이라는 것이 소리의 영역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소리의 권위를 약하게 함과 동시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정말로 필수적인 것, 시간이다.

‘모-노’는 기저에 시간성이라는 음악의 필수조건을 깔아둔 채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될 수 있었다. 각 페이지에 제시된 음악상징과 음악과 관계된 텍스트들은 감상자들에게 대상을 즉각적으로 규정짓지 못하게 함으로써 관성적 감상을 방해하며 주의깊은 식별을 요하였고, 그러한 인식의 과정에서 감상자들은 끊임없이 눈 앞에 보이는 오선보를, 그림을, 사진을, 그래픽 기보를, 그리고 음악을 의심한다. 동시에 감상자들은 그들의 음악적 인식에 대해 되돌아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노’는 비규정성이 불러오는 감상자 자신들에 대한 음악적 기억들의 콜라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작품 내부적 텍스트와 관련된 내용들은 음악의 본질이 될 내용과 맞닿아 있거나 혹은 비어있다는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음악적 내용, 즉 기의가 존재하건 아니건 확실한 것은 그것은 오롯이 ‘시각적인 것’은 아니란 점과 ‘모-노’의 무대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노’는 다양한 시각적인 매체로 표현됨에 따라 매체와 내용간의 불일치를 야기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긋남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내용과 작품의 목적에 집중하게 만들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모-노’라는 음악작품은 기존의 음악작품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이전의 역사적 맥락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앞서 나왔던 다양한 형태의 현대음악들이 확장시켰던 음악작품개념을 보다 발전시키고, 융합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우연성 음악을 넘어선 ‘극도의 비규정성’, 악음에서 노이즈로 탈피한 것보다 한층 더 나아간 ‘청취에의 해방’, 시각성을 강조하는 그래픽 악보들을 보다 더 발전시킨 ‘새로운 매체’로서의 책, 통일되지 않은 매체들을 사용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음악의 순수한 내용과 목적’에 집중케 한 것,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엮어주는 ‘시간성’까지. 여태까지 숱하게 있어왔고 이 글에서도 몇차례나 던졌던 그 질문, 과연 ‘음악이란 무엇일까’. 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싶다면 소리의 즐거움에서 잠시 벗어나『모-노』가 아닌 《모-노》를, 음악을 읽어보자.

2013 객석예술평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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