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이후의 음악 – 오민 작가와의 대화

소리 이후의 음악오민 작가와의 대화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것은 아주 작은 균열들을 발견했을 때였다. 뒤틀린 오선보가 그려져 있는 캔버스, 작곡가가 『읽기 위한 음악』이라는 , 침묵하라는 단어만이 적혀있는 악보, 「보는 의성시」라고 하는 음악인지 미술인지 없을 어떤 지면,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면 연주를 시작하고 생각이 다시 시작됐다면 연주를 멈추고 생각 없음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기이한 지시문까지. 그러니까 만약 캔버스와 악보와 지면과 지시문을 음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음악을 눈으로도 있고 읽을 수도 있고 침묵하면서도 들을 있고 순수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로 무언가를 연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겠다.

음악을 묘하게 긴장시키는 대상들을 한낱 장난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의심이 피어올랐다. 혹시 이것들이 음악의 핵심에 가까워지려는 지난한 시도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음악에서 탈락한 부스러기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결정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미술가 오민의 경우를 보자.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소리, 연주의 순간들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장면, 연주자의 몸을 거쳐 다시 만들어진 악보, 인식을 훈련하기 위한 연습곡, 공연이 되는 연습, 공연에서 보이지 않았던 순간들을 끄집어내어 구성(compose)하는 무대. 음악과 음악 아닌 것들,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이 뒤섞이고 교차하는 오민의 세계에서음악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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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2016)
안무, 퍼포먼스: 아케미 나가오, 사운드 디자인: 홍초선, 두산갤러리 지원

 

신예슬  음악은 일반적으로시간을 바탕으로 소리예술 정의됩니다. 하지만 저는 음악이 반드시 소리여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소리예술이라는 음악의 일반적인 정의를 무효화한 음악에 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저는 작가님의 작업이 단순히 음악을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음악이 아닐 이유가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음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생각하고 계신 음악이 작업과는 어떻게 연계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오민  최근 제가 음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소리는 진동이라고 있을 텐데, 단위 시간당 진동수에 따라 음높이가 결정되고, 가지 다른 진동 수의 음이 울렸을 파형이 얼마나 충돌하느냐에 따라 음의 관계가 결정됩니다. 선법, 장단음계, 온음음계, 12음음계와 같은 음의 사용 체계나, 모노포니, 폴리포니, 호모포니와 같은 음의 조직 방식 모두, 기본적으로 음과 음의 관계를 묻습니다. (서양) 음악의 구조는 주제와 주제가 발전된 간의 관계로 구성되며, 주제 선율을 구성하는 음이 어떠한 관계로 조직되느냐가 주제가 발전하는 방향의 단서가 됩니다. 음악이 무엇이지 질문하신다면, 저는소리의 관계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리와 관계 소리보다는 추상적 관계에 방점을 찍고 싶어요. 달걀보다 닭이 먼저라고는 생각하지만 실제적으로 저는 달걀에 관심이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있겠네요. 음악이 소리를 다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소리에 관심이 가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음악의 재료인 소리가 목소리에서 악기 소리로, 악기 소리에서 구체적인 소리로 확장되었고, 확장을 거듭하다가 침묵도 소리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진 지도 이미 오래전입니다.

신예슬  . 여전히 많이 회자되는 케이지의 <4 33> 대표적인 경우라 봅니다. 케이지는 악보에 ‘tacet’이라는 단어, 침묵이라는 단어를 적어둠으로써 작곡가와 무대와 악보와 연주자가 존재하는 음악 전통 안에서 침묵을 기울여 들어보도록 했죠. 이것이 일반적으로 음악에 기대하는 바와 다를지언정 침묵이 음악과 소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는 점은 말씀하신 것처럼 논의가 시작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민  그렇게 생각하면 현시점에서음악이 무엇인가 대한 질문보다, ‘소리란 무엇인가’, 혹은소리를 어떻게 들을 있는가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침묵이 소리라는 데서 걸음 나아가, 보는 것으로 관계를 감각함으로써 (상상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의할 있다면, 저의 영상 작업도 음악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영상은 분명히 소음 같은 소리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이미 현대음악의 역사에서는 오래전에 구체음악이 소음을 음악으로 포용했는데, 그중 피에르 쉐퍼의 초기작품 <기차연습곡>(Études aux chemins de fer) 도입부에서 경적소리가 울리고 그다음에 기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리는 부분이 저에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구성은 음악적이고 추상적인 선택이 아니라 움직임의 발생 순서를 반영한 것이고,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이 음악의 구조에 노골적으로 관여한 것입니다. <기차연습곡> 같이 연속된 움직임이 만들어낸 소리를 엮은 역시 음악이라고 있다면, 영상에서 구성된 움직임이 만들어낸 소리 역시 음악이 있겠죠. 물론 이런 식으로 개념을 확장하다 보면 모든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저에겐 미술가라는 확실한 정체성이 있어요. 다만 제가 만드는 작업들이 음악이 아니거나, 혹은 무용이 아니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신예슬  음악이 주제를 만들고 주제를 구성하는 관계성을 토대로 주제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음악의 전개 방식은 실제 작업 과정에도 반영될까요

오민  작곡가의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역시 먼저 재료를 생각하고, 그다음 구조를 생각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작곡이 대체로 소재에서 출발한다면 작업은 일종의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다른 같아요. 예를 들어 아뜰리에에르메스에서 열렸던 전시연습곡인식을 어떻게 연습할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질문은인식은 결국 보는 행위와 연결된다’,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것인가 같이 여러 방향으로 파생되는 다른 질문과 가정으로 연결되며 발전됐습니다. 재료로서 소재질문 언뜻 결이 매우 달라 보이지만 추상적 관계를 맺으며 점점 구조의 윤곽을 잡아간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유사해 보입니다. 구조의 틀은 발전된 질문들을 토대로 만들지만, 구조의 세부는 공연자와 함께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눈과 귀로 들어야 하는 컴포지션을 머릿속 추측만으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연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결정적인 디테일이 너무도 달라집니다. 깊은 생각에 빠졌을 어떤 사람은 눈을 이리저리 활발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추적하고 어떤 사람은 곳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처럼 단순한 행위 하나도 사람의 기질, 사고방식, 몸에 축적된 움직임에 따라 보이는 결과값이 천차만별인데, 실제 수행하는 사람 없이 가정만으로 시각 작품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추상적 관계와 논리로 작곡되는 음악의 경우 연주할 없이 만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가능하다고 가정할 있겠지만, 최근에는 음악 역시 없이 완성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신예슬  음악의 경우, 작곡 단계에서 연주자를 관찰하고 연주자와 함께 구조를 만들어가는 사례는 상당히 드문 같습니다. 연주자가 창작을 촉발시키거나 작품을 교정하거나 작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보통 연주자는 사후적으로 작품을 연주하는 일종의 매개자가 되기 때문에, 창작단계에서 공연자와 구조를 함께 짠다는 것이 음악의 관습에서는 다소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몸과 함께 작품의 구조를 짜게 되면 공연자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작품을 공연하는 것보다 한결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연할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민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릿속에 그렸던 구조가 실제 몸을 거쳤을 무엇이 나오는지를 보기 전에 그것을 과연 어떻게 납득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동시대 무용가들을 통해 몸이 재료로서 작품에 관여하는 , 몸이 어떤 방식으로든 창작에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2016년에 제가 함께 작업했던 무용가 아케미 나가오는, 무용의 실질적 동작이나 현장에서 개입하는 즉흥적 요소는 이제까지 축적된 무용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에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무용가를 교체할 있다고 생각하는 안무가와는 함께 작업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말을 들을 당시에는 작곡된 음악이 여러 연주자를 거치며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상당한 즐거움인데 그걸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다양한 공연자들과 협업 해오는 동안 나가오의 말이 납득되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협업이라는 것은 정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므로 저도 아직 어떤 정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무용에 비해 음악에서 연주자에 대한 고민이 다소 간과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가 저에게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공연의 아이디어에 맞는 몸을 찾아, 몸에 기반하여 완성된 작품을 보게 되면, 관객 역시 공연이 추구하는 어떤 최대치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보게 것입니다. 무엇이든 최대치를 본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후략)

전문: Festival ATM(Audio Trading Manual) Website by Arts Incubator
https://www.audio-trading-manual.kr/interview-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