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F: 윤이상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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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을 기억하며
2017년 9월 16일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

Piri(1971)

윤이상의 작품 중 ‘소리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곡 중 하나로, 오보에 선율은 끊임없이 음색과 두께를 바꾸어가며 소리의 다양한 결을 들려준다. 작품 제목인 ‘피리’는 한국의 전통악기를 뜻하는데, 오보에는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힘 있는 소리와 섬세한 떨림 등 피리 특유의 다양한 음색들을 상세히 묘사하듯 연주한다. 작품은 선명하게 지속되던 소리가 점차 다채롭게 꾸며지며 상승하다가 다시 하강하며 흩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피리>는 1967년 윤이상이 동백림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에 쓰인 곡인데, 그는 오보에 연주자 하인츠 홀리거(Heinz Holliger)에게 이 작품 후반부의 고요한 대목이 “감옥에 있을 때 한 줄기 빛이 고요히 흘러들어왔을 때의 느낌”과 같다고 말했다.

Oktett(1978)

윤이상이 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작곡한 단악장 작품이다. 윤이상은 이 작품에서 거문고, 해금, 아쟁 등 여러 한국 전통악기들의 음향과 주법을 묘사하는 동시에 악기들을 여러 방식으로 조합해나가며 다채로운 색채의 앙상블을 빚어냈다. 또 이 작품은 그가 관심을 두었던 동양적, 도교적 사상과 더불어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는 정중동(靜中動)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동적인 부분, 정적인 부분, 동적인 부분까지 세 부분으로 나뉘는 섹션간의 차이는 물론 함께 연주되는 서로 다른 성격의 미세한 음형들까지, <옥테트>에서는 여러 층위에서 움직임과 머무름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여덟 개의 악기는 한데 모여 크고 풍성한 소리를 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호흡으로 윤이상이 상상한 음악적 장면을 더욱 자세하고 낱낱이 들려준다는 인상을 준다.

Garak(1963)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은 윤이상이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았던 시절의 작품으로 당시 그는 유럽에서 접한 새로운 어법들과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음악을 어떻게 엮어내야 할지를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윤이상은 이 곡에서 12음기법을 이용해 기초 음렬을 6음마다 피아노와 플루트에 부여하며 작품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이후에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하나의 음이 가진 생명력과 호흡, 그리고 음향적 판타지가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대금을 연상시키는 플루트의 선율은 짧은 호흡으로 점차 상승하며 조금씩 더 크게 요동치고, 피아노는 윤이상의 표현처럼 작품에 일종의 ‘구두점’을 찍는 듯한 역할을 맡는다. 플루트 선율을 꾸며주는 장식음, 다양한 종류의 비브라토, 세세한 음고변화는 마치 국악의 시김새처럼 표현된다.

Tapis for String Quintet(1987)

윤이상의 후기작품 <융단>은 그 제목처럼 소리 가닥들이 서로 엮여가며 한 폭의 음향적 융단을 직조하는 곡이다. 이 작품에서 윤이상은 이전까지 그가 주목했던 것처럼 소리의 생명력을 힘있게 표현하는 것에서 한층 더 나아가 소리들의 어우러짐을 통해 부드러운 ‘텍스쳐’를 만들어낸다. 윤이상은 소리 하나하나를 ‘붓질’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작은 붓질들이 모여 큰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곡을 이루는 작은 음형들이 서로 매듭을 지어가며 점차 유기적으로 확장되어간다. 이전 작보다 한국 전통악기의 음향을 직접 모사하는 부분은 드물지만, 특정 음형과 주법들에서 동양적인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 <융단>은 때로 동서양의 음악을 조화롭게 융합한 상징적인 작품으로도 해석된다.

Teile dich Nacht(1980)

<밤이여 나뉘어라>는 유대인으로서 나치 시대를 살았던 시인 넬리 작스(Nelly Sachs)의 시에 붙인 솔로 칸타타다. 작스의 시는 나치 시대에 피할 수 없었던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 폭행을 담고 있으며,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백림사건으로 탄압받은 후 독일에서 지내던 윤이상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보도를 접했고, 작스의 시에 깊게 공감하며 이를 음악화했다. 부인 이수자 여사는 윤이상이 ‘울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 곡에는 홀로코스트를 상징하는 「굳게 닫힌 문(Diese verschlossen Tür)」, 현실과 유리된 관계를 반영하는 「창문 앞에서(Vor meinem Fenster)」, 그리고 인간성을 책망하는 「밤이여 나뉘어라(Teile dich Nacht)」까지 총 세 편의 시가 텍스트로 사용되었고, 음악은 시의 내용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그 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로 시작하는 첫 번째 시는 말을 무겁게 뱉어내며 참상을 노래하고, 창문 앞에서 같은 새소리를 듣지만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내용의 두 번째 시는 높은 음역에서 열린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나갈 수 없는 현실을 묘사하듯 다시 무겁게 가라앉는다. 세 번째 시 「밤이여 나뉘어라」는 단호한 분위기로 시작되어 점차 감정이 고조되다가 ‘나는 곧 떠날 것이고, 네게 피비린내 나는 밤을 돌려줄 것이다’라는 가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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