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dency in New York

Arts Incubator in New York
Mise-en-Place in Bushwick, New York, United States
2018.12.20 — 2019.1.6
레지던시 일지

 

Arts Incubator 윤소진 문석민 신예슬
Thanks to Ensemble Mise-en

 

미장 플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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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지던시에서의 계획

한날 한시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작은 소란을 일으켜놓고 시간이 지나면 끝을 내고 모두 제자리로 되돌아가게 하는공연이라는 사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이런 원대한 질문을 던져보려고 했었다. 기획자 윤소진, 작곡가 문석민과 레지던시차 뉴욕에 2주간 머물 기회가 생겼고, 분이 무려신작 초연준비를 한다길래, 마침내 매일매일 분께공연 하세요? 우리는 공연을 해야 할까요? 공연이 정말이지 너무 좋긴 한데 대체 이건 좋은 걸까요?’라는 질문을 던지며 공연 제작에 관한 사적 호기심을 충족시켜볼 생각이었다. 어쩌면 분이 별로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집요하게 캐물으며 기획자와 작곡가를 번거롭게 만들 생각에 신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분이 뉴욕행 비행기에서 긴급하게 상의한 결과 공연을 만들겠다던 야망찬 계획은 상황상연주 영상 제작으로 변경되고야 말았다. 공연을 하지 않게 상황에서 공연을 만드느냐는 머쓱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다른 글감을 찾아야만 했다.

레지던시 기간을 의미 있게 만들려면 의외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해본 경험을 하고 해본 생각을 떠올리며 그것이 추후 작업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로울 것이다. ‘영상 제작 새로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 2주라는 시간을 내리쏟아 비평의 주제로 다룰 만큼 궁금하지는 않았고, 외에는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아주 오래된 주제들밖에 없었다. 새로운 주제를 찾지 못한 이미 몸에 글감들을 다루기엔 기획자와 작곡가와 함께 뉴욕에 머무르는 낯선 시간이 몹시 아까웠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그리하여 이번 레지던시 기간에는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새로운 글감들을 수집해보기로 했다. 뇌리에 맴돌던 어렴풋한 생각들을 기록하고 작은 의문을 관찰하고 음악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모르던 것을 배우고 뉴욕에서의 새로운 경험에 집중하다 보면 이후에 다뤄보고 싶은 질문들을 찾을 있지 않을까. 대단한 경험도 대단한 문제의식도 아니겠지만 하루하루를 마감하며 짤막한 생각들을 적어나가다 보면 어디론가 가지가 뻗쳐나갈지도 모른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음악에 대한 호기심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12 20.

 

2
음악과 텍스트

유럽 음악의 역사를 따르는 소위현대음악계 현실이 도시마다 아주 크게 다르진 않은 것인지, 이곳 뉴욕에서도 많은 이들이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고 마찬가지로지원금이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존재한다. 우리가 머무는 이곳미장 플레이스 부슈윅’(mise-en_place bushwick) 아티스트 레지던시와 공연장이 맞붙어있는 공간이다. 공연이 있는 날에는 바로 옆문으로 들어가 공연을 수도, 아니면 레지던시 소파에 앉아서 들려오는 소리를 엿들을 수도 있다. 이날은고스트 앙상블’(ghost ensemble) 공연이 열리는 날로, 레지던시 테이블에 짧은 공연 소개글이 있길래 잠시 읽어봤다. 뉴욕시의 지원을 받는 공연이었다. 2 혼톨로지(hauntology) 불리는 음악에 관한 논문을 나로서는 관심을 끄기 어려운 앙상블 이름인데다 곡목도 어딘가 일관성이 있어서(hover, the past, landscape: ghost(home), deconstruct), ‘이건 혹시 뉴욕이 나를 운명적으로 환영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빠져 공연에 대한 무조건적 호의를 가져버렸지만, 들을수록 점점 호의는 사라졌다. 제대로 듣기도 전에텍스트만 읽고좋을 것이라 기대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유령이나 해체, 과거 같은 개념은 여러 말들을 끌어오기에(혹은 지어내기에) 유용하고도 매력적이지만, 텍스트적으로 근사한 것과 음악의 논리는 너무나도 다르다. 물론 어떤 음악은 듣기만 해도 멋진 데다 그에 관한 글도 훌륭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작품 노트, 작가 노트, 비평, 그리고 결국 음악활동을 지속하는 부분을 차지하는 지원금을 위한 서류까지,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언어를 거쳐야 하는 상황에는 언제나 크나큰 실패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음악에 관한 글은 차라리 픽션에 가깝다. 언어 말고 다른 어떤 것으로 음악을 설명할 있을까. 어쩌면설명한다는 사실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음악의 의미는 너무나 정교하여서 언어의 성긴 그물이 그것을 잡아챌 없다고 했던 멘델스존의 말을 여전히 기억한다. 12 21.

 

3
작곡의 현장

<Fantasy> 작곡의 현장에 있었던 가와이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와 문석민과 탁구공과 이면지와 군번줄 

작곡가 문석민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피아노 독주곡을 완성할 거라고 했다. 악보가 어디까지 완성됐는지 궁금하여 조금 보여달라고 했더니 아직 아무것도 없어서 보여줄 수가 없단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음악을 되뇌는 중이라 해도 음표가 하나도 없을 있는 건가? 역시 작곡이라는 행동은 기보와는 명백히 다른 차원의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기록되기 전까지는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없는 일이다. 작곡가들의 작곡 방법이 서로 너무나 다른 탓이기도 하겠다. 혹자는 생각하는 모든 소리를 적어놓고 거기에 새로운 것들을 더하고 지우고 수정하며 악보를 완성하겠고, 혹자는 연주를 녹음해놓고 그걸 채보하겠고, 혹자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완성된 후에 필사하듯 그걸 악보에 적어나가겠다. 문석민은 물론 마지막 경우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악보를 쓰지 않은 문석민이 지금 하는지 관찰하는 것은, 기보와 작곡을 분리하는 사람이 작곡 단계에서 하는지를 관찰해볼 있는 기회일 것이라 생각했다.

곡의 가제는 <Fantasy>. 악기의 가장 일반적인 소리와 특수주법으로 내는 소리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한다는 문석민의 최근 관심사를 반영하면서도 어렵다던 피아노라는 악기와 전면전을 치르는 곡이었다. 피아노가 어려운 이유는 모두가 피아노를 알고 있고, 피아노 독주곡 레퍼토리도 산처럼 쌓여있는 데다프리페어드 피아노 유구한 전통 탓에 새로운 소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피아노는 너무 많은 사랑을 받은 나머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일도 이미 반백 년이 훌쩍 지났다.) 상황이 이런 만큼 문석민은 새로움을 기대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아이디어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소리를 만들어갈지를 고민했다.

이날은 곡에서 소리들을 점검 보완하는 단계였다. 작곡가는 베이비 그랜드 피아노를 꺼내놓고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탁구공 서른 개와 군번줄, 일렉기타용 장비 E-Bow, 슈퍼볼 말렛을 피아노 현에 들이대보고, 쓸만한 사물들을 찾아보며 소리를 수집했고 나는 광경을 목격하다가 가지 사물을 제안해봤다. 귀마개, , 신발끈 등은 별다른 효용이 없어서 탈락했지만 플라스틱 옷걸이는 강력한 소리를 냈던 관계로 낙찰됐다. 작은 사물들이 악기에 얹혀있는 광경은 이제는 익숙하다. 언젠가 수많은 사물이 피아노를 뒤덮어버린다면 마침내 피아노는 더는 피아노일 필요가 없게 될까? 오래된 악기의 정체성은 언제까지 남아있을 것이며, 언제 새로운 악기로 대체될까?

고정 형식이 없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Fantasy’ 나름의 전통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없다고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그럼에도 으레 ‘Fantasy’스러운 무언가가 있기야 하겠지만, 곡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수집된 소리들이 어떻게 엮일지 궁금하다. 어쨌든 작곡가는 즐거워 보였다. 12 22.

 

4
한낮의 파티

점심에 앙상블 미장(Ensemble mise-en) 멤버들의 크리스마스 파티 아츠 인큐베이터 환영 파티가 열렸다. 함께 먹을 음식들을 준비해 가져와서 식탁에 늘어놓고 이곳 분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이번 레지던시에서의 활동계획, 미장과 아츠 인큐베이터의 지난 협업과 앞으로의 일에 관한 얘기, 뉴욕에서의 생활, 2주간 뉴욕에서 즐길만한 일들에 관한 얘기들을 차분히 나눴다. 12 23.

 

5
청취환경

라흐마니노프 같은 . 그런 마실 때나 가끔 들어줄 만한 거지, 그럴 아니고서는 …”

어떤 분이 했던 말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음악과 술을 번에 깔아뭉개다니. 말을 정말 오랫동안 생각해봤다. 이분에게 청취란 것은 대체 뭘까. 언제나 객석에 앉아서 눈과 귀를 무대에 집중하고구조적 청취 하면서 동기의 전개양상을 파악하며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방식과 기타 등등의 음악적 전략들을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이런 말도 들어봤다.

아니아니 잠깐. 우리가 마시면서 이분 음악을 들으면 실례지. 빨리 .”

어떤 음악은 절대로 배경음악이 되면 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고귀한 음악은 음주와는 어울릴 없다는 것인지 여전히 헷갈리지만 어쨌든이분의 음악 모독하지 말자는 취지의 말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한참 나누다가 이렇게 말만 하지 말고 직접 들어보자는 의미로 누군가 음악을 틀었지만 누군가 말을 하며 제지했고, 놀랍게도 고개들이 끄덕였다. 일단 음악을 틀어놓고 음악이 언제 귀에 들어오는지 기다려보면 되고, 음악의 무드를 멀찍이서 파악해보면 되는가. 그런가 하면 나는 이런 말을 적이 있다.

저는 일과 마친 뒤에 한잔 마시면서 재즈를 많이 찾아들어요.”

경멸의 시선이 돌아왔다. 어떤 분과 재즈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 어떤 음악가를 좋아하냐길래 니나 시몬과 까를로스 조빔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했고, 보통 재즈를 언제 어떻게 듣냐고 묻길래 저런 대답을 했더니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대체 내가 잘못했을까 고민해봤다. 생생한 연주가 이루어지는 재즈바에 가지 않은 것이 잘못일까, 술을 마신 잘못일까, 아니면 낮에 들어서 그런가. 그런데 재즈바에서는 밤에 공연하고 술을 마시던데 나는 눈빛으로 혼났을까. 하루 가장 고대하는 시간이 일과 음주 청취 시간인데 정말이지 그러면 되는 것일까. 음주도 청취도 계속해오는 탓에 종종 말들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여 우리는 레지던시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만들어 먹었고, 좋은 향을 피웠고, 아주 훌륭한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고, 좋은 술을 마셨다. 나에게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음악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음악에 집중할 있는 최적의 환경 하나다. 윤소진은 청취환경 구축의 전문가였고, 문석민은 언제나 좋은 술을 골랐고, 분은 술과 함께할 음식을 만드는 도가 있었고, 우리는 음악에 대해 얘기를 매일같이 나누고 있었으니 거의 완벽에 가까운 환경이었다. 물론 (서유럽 전통의 음악을 따르는 경우) 카네기홀이나 베를린 필하모니에나 예술의전당처럼 음악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공간에서 유령처럼 조용히 앉아서 음악을 듣고 오는 것도 너무나 좋지만, 따뜻한 곳에서 동료들과 슬쩍 대화도 나누어가며 편안한 자세로 좋은 향을 맡고 적당량의 술을 마시며 점점 너그러워지는 마음을 장착하고 음악을 듣는 것도 너무나 좋은 아닌가.

2018년에 봤던 가장 아름다운 공연 하나는 박민희의 <춘면곡/권주가>였다. 나는 그물침대에 반쯤 걸쳐져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춘면곡> 들었고, 술병을 받아들고 냄새를 킁킁 맡다가 결국 홀짝홀짝 마셔대며 <권주가> 들었다. 여러 면면이 죄다 근사했지만 우선 음악과 음악 바깥의 경험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고, 한편으로는 청취의 방식이 일순간 유연해져서 거의 감사할 지경이었다. 청취를 규제하던 말들이 주던 스트레스에서 훌쩍 벗어났던 순간이었다.

뉴뮤직 페스티벌 ATM 2018에서 진행했던 헤테로포니의 좌담청취의 매뉴얼에서는 각자가 청취환경을 조성하는 방식이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었다. 내가 꿈에 그리던 청취환경을 조성한다면 그건 과연 어떤 형태가 될까. 어쨌든 거기에 술이 없을 이유는 없다. 12 24.

 

6
크리스마스

늘어지게 쉬었다. 12 25.

 

7

일하던 도중 업무 현장기록을 위해 정리해놓은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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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까지 반드시 정리해야 일들이 있었다. 윤소진은 정산과 새해 프로젝트 계획과 더불어 곡도 써야 했고, 문석민은 이제는 정말 곡을 마감해야 했고, 나는 뉴뮤직 페스티벌 ATM 2018 레포트를 작성해야 했다. 모두 타이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뭔가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때는 매일 조금씩 그랬다며 후회하지만, 일이 마감 직전에 제일 잘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석민과 나는 각자의 일을 어느 정도 마친 뒤에 윤소진과 함께 아츠 인큐베이터의 새해 프로젝트 계획서를 마무리했다. 작업실 생활을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감은 오지만, 함께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의 엄청난 몰입도가 있어서 이래서 돈을 내고서라도 작업실에 입주하는 건가 싶었다. 12 26.

 

8
리뷰를 쓴다는

공연 리뷰의 독자는 누구인가. 장르 특성상 독자층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아주 알고 있음에도 누가 리뷰를 읽을 것인가를 따져보는 일은 고민이 된다. 대략 구분을 해보자면 공연을 사람, 공연을 사람,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사람, 공연이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 정도가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리뷰를 쓰는 것은 누구라도 불가능할 테니 가끔은 부류라도 만족할 있을 법한 리뷰를 써야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어쩐지 그건 내가 있는 일이 아닌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구조를 짰어야 했던 걸까?

  1. 공연이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을 위해 공연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주기
  2.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사람을 위해 공연장의 분위기와 세부 프로그램을 전반적으로 갈무리하기
  3. 공연을 사람을 위해 나는 이걸 어떻게 봤는지 감상을 공유하기
  4. 공연을 사람을 위해 좋았던 점과 흥미로웠던 점과 아쉬웠던 나름의 피드백을 주기

많은 리뷰가 일단은 이런 구조를 따르는 같고 나도 앞부분은 이런 식으로 쓰지만, 나에게 가장 어렵게 다가오면서도 필자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3번과 4번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아마도 3번의 결론은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어쨌다는 거야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겠고, 4번의 결론은그래서 어쩌라고 대한 답이겠지만, 나는 공연에 대한 상찬이나 비판보다는 형식과 방법론에 관심이 있는 관계로 질문들에 명확히 답하지 못한다. ‘평가 대해서는 점점 관심이 없어지는 데다가 나에게는 그게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공연자들에게 피드백을 수야 있겠지만 타인의 일에 어디까지 개입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떤 일에 관해서는 글이 나름의 방식으로 작동하길 바라긴 하지만 그건 윤리적 사안이나 제도적 차원의문제상황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만약 공연자가 내가 피드백을 적극 받아들여 작업의 방향을 재조정했다가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가 나와버린다면 정말이지 무서우면서도 부끄러울 것이 분명하다. 내가 리뷰가 평가나 피드백의 차원과 완전히 분리될 없겠지만지금은 이래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바꾸면 거야라고 말하는 레슨 선생님이나 코치 혹은 심판관의 일이지, 일은 아닌 같다.

그래서 내게 리뷰를 쓴다고 하는 것은 공연에 대한 결론을 유보한 공연의 형식이나 방법론이나 그에 잠재된 근본적인 질문들을 조금 생각해보자고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명쾌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모든 것이 전달되고야 마는 깔끔한 공연에 대해서는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 물을 것이 없으니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동료들에게 이런 어려움을 토로하며 난처한 마음으로 그런 리뷰를 썼다. 12 27.

 

9
히피들의 밴드 PHISH VIP 탐방

이런 열렬한 현장은 정말이지 적이 없었다. 친구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PHISH’라는 밴드의 공연의 VIP 티켓이 있다며 나를 초대했다. 근처 바에서 조금 일찍 만나기로 해서 만남 장소에 가보니, 모든 사람이 밴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 있고, 메뉴판을 받았는데 모든 메뉴가 밴드의 트랙 이름들로 적혀 있는 데다가 어떤 양조회사는 이번 공연을 위해 특별 에일을 만들었다는 거다. 모두가 합심하여 PHISH 사랑하는 광경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오늘이 처음이라고 옆사람에게 말하자 갑자기 그분이 팔을 잡으며뭐라고. 진짜야? 정말 부럽다. 나도 그때로 돌아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좋을거야. 장난 아니니까 기대해!”라고 하며 얼굴에 바르라고 글리터를 꺼내줬다.

시간이 되어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갔다. 이번 공연은 생애 최초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VIP 탐방이기도 했다. VIP석은 과연 엄청났다. 박스석처럼 만들어진 공간인데, 종류의 음식과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맥주, 위스키, 얼음, 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소파와 푹신한 의자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금융업과 관련된 회사가 클라이언트를 초대한 자리였던 같았다. 어떤 사람은 PHISH 엄청난 팬인 같고 어떤 사람은 흥미가 없어 보였고, 공간은 너무 황송할 정도로 좋았지만 공연에 최대한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업계인들끼리 준비된 환경에서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서로 알아가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듯했다.

마침내 PHISH 등장하자, 사람들이 야광봉과 풍선을 끊임없이 던지고, 모두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추기 시작하며, 계속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엄숙한 공연장에 익숙한 나에게 이런 분위기는 공연이라기보단 대규모 파티에 가깝게 느껴졌다. 청중의 반응이 너무나 강렬하여 아주 폭발적인 음악일까 싶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대체로 느긋한 분위기인 데다 가사가 없는 곡도 상당수고 하나당 10분이 넘어가는 데다 밴드는 없이 묵묵히 연주만 이어갔다. 듣자 하니 히피 세대의 영웅 같은 밴드라고 했다. 이렇게 여유롭고 열렬한 데다 객석에서 기쁨과 행복감이 끝없이 퍼져나오는 공연을 목격하는 처음이었다. 이리저리 취해서 춤도 추며 즐기는 사람들을 보고 내심 부러운 마음에 나도 그렇게 즐겨보고는 싶었지만 아무래도 곧장 적응하긴 어려웠다. 음악이 나와 정서적으로 탓인지, 내가 늘상 좋아하던 종류의 음악이 아니어서인지, VIP석이라서 그럴 없었던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공연 1부가 끝나고 나니 거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30 휴식 2부가 이어진다고 해서 늦기 전에 PHISH VIP 좌석 탐방을 마무리하고 귀가했다. 경험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같다.

조명이 무척 화려하고도 바빴던 PHISH 공연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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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현대음악의 현장에서는 과연 어떤 순간에 강렬한 기쁨을 목격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들 속으로만 기뻐하고 겉으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12 28.

 

10
나선형의 공간

구겐하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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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구겐하임에 다녀왔다. 전시는 힐마 클린트(Hilma af Klint) <Paintings for the Future> 이와 연계된 R. H. 쿠에이트만(R. H. Quaytman) <+ x, Chapter 34>. 힐마 클린트의 작업을 보며 빙글빙글 걸어올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R. H. 쿠에이트만의 작업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쿠에이트만의 작업이 힐마에 대한 일종의 화답처럼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런 전시형태는 나선형으로 설계된 공간에 상당히 적합해 보인다. 이곳에서는 작가의 작품을 ‘연 선상’에 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중앙 천장 부분을 비워둔 둥글게 걸어 올라가게 설계된 공간에서 전시를 보는 경험은 큐브에 들어가 가장 적절한 위치에 서서 작품들을 보다가 다음 방으로 이동하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고, 다음 방으로 이동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소장품이 있는 몇몇 전시장을 제외하면 구겐하임은 큐브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기나긴루트 제시한다. 이곳에서는 공간이 쪼개져 있지 않은 만큼 시간도 경험도 분절되지 않는다. 구겐하임이 제안하는(강제하는) 동선은 작품 하나하나로 관람자를 끌어들이기보다는 전시 전체를 관망하게 한다. 각자의 템포에 맞춰 움직이기 편하기 때문인지 작품들을 보며 나의 경험이 만들어지는 광경에 쉽게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전시 관람 경험이 누적되며 쌓아올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동선에는 경험의 방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경험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우선 공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음악을 공연장처럼 정지된 공간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전시장 같은 공간에 널어둔다면 과연 시간 경험의 동선과 템포는 어떻게 조정되어야 할까. 12 29.

 

11
리허설 테크닉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작곡가들에게는리허설 테크닉이라는 있다고 한다. 제한된 시간 안에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연주자와의 원활한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리허설을 구성하는 것이테크닉처럼 필요하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렇다. 리허설은 연습이기도 하지만 대토론의 장이기도, 악보 교정의 현장이기도, 서로가 서로를 설득하는 교섭기간이기도 하다. 어떤 작곡가는 어차피 연주자가 어떤 점이 부족한지는 스스로 제일 알고 있으므로 굳이 그걸 다시 지적하지 않고 리허설 때는 연주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신뢰를 쌓아가는 주력한다고 하고, 어떤 연주자는 악보를 무척이나 꼼꼼히 읽어와서 마치 교정자가 오탈자를 찾듯혹시 여기에 음이 잘못 적힌 것은 아닌지 한번 살펴보세요.”라고 말하며 적극 개입한다고도 한다.

한편 불필요한 감정낭비가 없도록 서로에게 신뢰와 호의를 보여주는 것도 리허설에 참여하는 모두가 가져야 덕목 하나다. 작곡가가 연주자의 면전에 대고 주법이 안돼요? 제가 해보고 건데요.”라고 말해버리거나 혹은 연주자가 작곡가에게곡을 이렇게 써놓으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악기를 하나도 모르고 썼구먼.”이라고 말하면 모두의 마음이 너무 상해버린 나머지 연주는 처참히 망해버리고야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숨김없이 논쟁하는 광경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아직 그런 경험은 없고, 리허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한다. 작곡가와 연주자뿐 아니라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기획자와 스태프도.

이날은 문석민의 <Fantasy> 초연할 피아니스트 유미 스히로(Yumi Suehiro)와의 리허설이 있었다. 악보를 받은 며칠이 지나지 않은 탓에 오늘의 리허설은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된 연주를 들려주며 디테일한 흐름을 조정한다기보다는 악보를 하나씩 짚어가며 기호와 소리의 관계를 점검하는 과정이었다. 작은 천가방에 탁구공을 넣어두고 그걸 피아노 위에 쏟거나, 군번줄과 현이 마찰하는 소리를 내고, 옷걸이로 현을 긁는 피아노 내부에서 많이 하는 만큼 작곡가와 연주자는 정확한 투하지점과 마찰의 빠르기 등을 상세히 상의해야 했다. 피아니스트 유미는 문석민의 곡을 벌써 곡째 연주해본다. 어쩌면 유미는 문석민이 근래에 어떤 곡을 쓰고 있는지 가장 가까이서 알아가고 있는 연주자인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눴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대일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리허설 현장에서리허설 테크닉보다는 평화롭고 솔직하게 각자 하고 싶은지 차근차근 얘기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Fantasy> 유미 스히로에게 헌정됐다. 12 30.

‘E-Bow’ 위치를 체크 중인 문석민과 유미 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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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년 전야

새해가 되자마자 처음 듣는 음악이 해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는 농담 섞인 글을 봤다. 미신도 이런 미신이 없지만 말이 점점 은근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희망찬 새해를 염원하며 기가 막힌 것을 들어야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행여나 어떤 음악을 무심코 들어버렸다가 해가 의도치 않게 흘러가버리면 음악을 원망해버릴 것만 같았다. 12시가 지나자마자 뭔가를 들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기왕이면 자고 일어나서 새해 아침에 듣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선 아무것도 듣지 않은 한해를 회고하다 잠들었다.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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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Travail/Arbeid> / <Vortex Temporum>

새해의 음악을 고르는 일이 결국 2019년의 모토를 결정하는 일처럼 되어 버렸다. 고심 끝에 내가 고른 것은 오민 작가가 소개해준 안느 케이르스마커의 <Work/Travail/Arbeid> 관한 영상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제라르 그리제이의 <Vortex Temporum> 맞춰 안느 케이르스마커가 안무를 작업으로, 내가 영상은 뉴욕 모마에서 열렸던 공연 현장과 아티스트 프로필이 적절히 섞여있는 클립이었다. 2017 , 서울에서 팀프 앙상블의 연주로 처음 들었던 <Vortex Temporum> 시간의 소용돌이라는 제목만큼 시간의 감각이 기묘하게 뒤엉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라 듣자마자 사랑에 빠지기도 했던, 각별한 곡이다. 이전엔 곡을 굉장히 좁은 공간에서 (마치 심해로 가라앉는 것처럼) 점점 어두워지는 조명과 함께 듣는 것이 최고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연한 환상과는 달리 안느 케이르스마커의 작업에서는 넓고 밝은 공간에서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흘리며 바삐 움직였고, 현장에 있던 연주자들도, 무려 그랜드 피아노도 음악에 맞춰 나름의 안무를 하듯 빙그르르 돌았다. 그리제이의 <Vortex Temporum>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보이지 않는 소리에 얹혀 음악적 공간 안에서의 소용돌이를 만든다. 한편 안느 케이르스마커의 <Work/Travail/Arbeid>에서는 음악이 공간에서 인간의 신체들과 악기라는 물체들과 함께 앞에서 소용돌이의 궤적을 그려간다. 연주자들의 머릿속엔 환영처럼 남아 있었겠지만 소리에서는 결코 없었던 신체와 악기의 움직임, 그리고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똑똑히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Work/Travail/Arbeid>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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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보고 들으며 올해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근사한 것들을 많이 보고 들을 있기를, 음악을 통해 느린 시간, 빠른 시간, 걷잡을 없이 꼬여가는 시간들을 경험하기를, 그리고 음악을 더더욱 신체적으로 감각하기를 소망했다.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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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A ‘Judson Dance Theater: The Work Is Never Done’

미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신체를 이해하는 , 움직임을 이해하는 , 소리를 이해하는 법을 차근히 쌓아가고 있다. 보는 것을 넘어서 미술이 마침내 모든 감각이 뒤섞인경험 전시하는 것에 이를 있었던 데는 보기 이후의 감각들을 바쁘게 수집해왔던 지난날의 역사가 자리한다. 그런 과정에서 무용이나 음악의 개념은 흔들리고는 했을 것이다.

뉴욕 모마 2층에 진입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추고 있는 트리샤 브라운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다. 큼직한 화면에서 영상을 보다가 옆쪽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1960년대 초반에 안무가, 시각예술가, 작곡가, 영상제작자들이 ‘Judson Memorial Church’ 한데 모여 꾸려나갔던 퍼포먼스 워크숍과 결과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이 모임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본느 레이너, 데보라 헤이, 데이빗 고든, 루신다 차일즈, 스티브 핵스턴, 트리샤 브라운의 작업들에 초점을 맞췄다. 작업들에서 공간을 다루는 방식, 사물과 신체를 엮는 방식, 움직임을 보여주는 방식이 가장 보편의무용과는 다른데, 이는 안무가들이 무용으로부터 조금씩 뒷걸음치다가 여기에 당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안무가들이 신체를 새로운 오브제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그간의 무용으로부터 틀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들을 그저 ‘춤’으로 인지하기보다는 공간과 신체와 움직임으로 분절해서 생경하게 바라보게 되고, 한편으로는 미술의 외연이 어떤 면으로 확장되어 왔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지금의 관람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영상이므로 이런 종류의 작업이 가끔은 생략하곤 하는시간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미술이 시간에 익숙지 않다면 그것은 미술의 근본적인 속성때문일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아직 음악과 감각을 충분히 교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유럽 전통 음악으로부터 이어져오는 현대음악이 내게는 음악을 떠올리는 가장 친숙한 방식이므로, 우선  음악에 한정해 생각해보자. 어떤 현대음악은 공간과 신체와 움직임이 음악을 매개하고 곧장 사라져야 하는 투명한 매체로 바라본 시간과 소리에 집중한다. 극적인 퍼포먼스와 결합된 음악, 연주자의 몸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음악,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음악 많은 곁가지들이 있지만 그것은 대체로공연이라는 형태를 벗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음악이 형성해왔던 공연의 문법에서 예상보다 많이 벗어나면 그것은 음악의 외연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음악이 아니게 되거나,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일탈이 된다. 개개인이 그런 작업을 존중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장르에서 제도화된 공연의 관습이 완고한 탓이다. 영역과의 만남은커녕 그에 선행되어야 할 유연한 창작자들의 소통도 쉽지 않다. 뻣뻣한 제도 안에서 해낼 수가 없으니 개개인이 바깥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 탓에 창작자들만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대체로 답답하지만 현대음악계 주변에서 열리는 일들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음악의 방식으로 근사한 시간을 경험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음악의 시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음악을 둘러싼 제도의 경계가 조금씩 유연해졌을 , 음악이 간혹 지나쳐버리는 공간과 신체와 움직임을 음악의 방식으로 고민한다면, 혹은 음악이 쌓아온 시간의 감각을 다른 이들과 공유한다면 정말 근사한 것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도통 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조금씩 언어를 발굴해가는 것처럼, 음악계도 의외의 방식으로 어수선해지고 탁해질 있을까. 1 2.

‘Judson Dance Theater: The Work Is Never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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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

마침내 <Fantasy> 연주 영상 촬영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내일이라는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앙상블 미장의 타악기 연주자 조쉬 페리가 잠깐 미장 플레이스를 찾아왔다. 짧은 안부를 나누다가 윤소진이 조쉬에게 내일 혹시 함께 연주 영상을 촬영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고, 마침 조쉬는 작년 ATM 독주로 연주했던 작곡가 김성애의 <Collocation> 연주 영상을 찍으면 좋겠다고 했다. 작품과 연주자와 카메라와 스태프와 장소와 시간이 준비되어 있으니 못할 것이 없었다. 피아니스트 유미와 함께할 문석민의 <Fantasy> 촬영이 끝나는 대로 조쉬가 연주할 김성애의 <Collocation> 촬영하고, 함께 저녁을 즐기기로 했다.

급작스레 촬영 스케줄이 늘어났으니 함께 둘러앉아 서로를 독려하며 내일의 촬영을 차분히 계획했어야 했지만, 사실 윤소진과 나는 각자의 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윤소진은 1 21일에 열릴 트롬본 연주자 마크 브로친스키의 독주회를 위해 곡을 최대한 빨리 써냈어야 했고, 나는 작년까지 마쳤어야 하는 원고의 끝부분이 풀리질 않아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의 촬영을 위해서 대의 카메라와 조명, 피아노 위치 등을 미리 세팅해놨어야 했으니 혼자서 모든 것을 준비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마감을 앞두고 일이 풀리지 않았던 나와 윤소진은 날카로운 상태를 숨기는 실패했고, 문석민은 레지던시의 평화를 위해 혼자 모든 것을 세팅했고, 결국 무리한 나머지 감기에 걸리고야 말았다.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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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촬영

작곡가들이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분명했다. 먼저 <Fantasy> 경우. 피아노 독주를 찍을 때는 보통 1순위로 건반에서의 움직임이 보이도록 측면 화면을 잡고, 2순위로 얼굴을 잡고, 3순위부터는 각자의 재량껏 찍는 같지만, <Fantasy>에서 가장 고심했던 화면은 천장에서 피아노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건반에서 일과 현에서 일이 거의 반반이었기 때문이다. 장면을 위해 문석민은 우선 피아노 뚜껑을 해체하고, 쓰는 테이블 위에 삼각대를 올려놓고, 삼각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테이프도 붙이고, 위에 카메라를 장착한 아래로 꺾어서 피아노 내부가 보이도록 화면을 조정했다.

의연하게 높은 곳에 올라간 문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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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Collocation> 경우는 연주자가 정면을 바라보고 악기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으므로 정면샷이 제일 중요할까 싶었지만, 그렇게 화면을 잡으면 팔의 움직임은 보이지만 악기가 어떻게 연주되고 있는지를 샅샅이 보여주기 어려워서 마찬가지로 작곡가 김성애는 높은 위치에서 화면을 잡자고 제안했다. 각도에 따라 보이는 악기가 서로 달라지는 만큼 비슷한 높이에서 좌측과 우측도 촬영하는 일단은 최선의 방책이었다. 카메라 위치를 전부 바꾸고 조쉬가 한두 차례 리허설도 해야 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긴장도 마침 말렛을 풀어놓고 있던 조쉬에게 궁금했던 말렛들에 대해 잠시 묻는 여유도 가졌다.

뻣뻣한 자세로 조쉬에게 말렛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윤소진, 신예슬, 문석민 

 

뉴욕 어딘가에서 연주를 촬영하는 가장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온갖 사이렌 소리일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도 없고 소리가 무척 굉장히 탓에 피할 수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해야 한다. 사이렌 소리는 심지어 카네기홀에도 침입한다. 비상시를 대비해 사이렌 소리들은 응당 들려와야만 하겠지만 촬영할 약간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날 모든 연주를 녹음했던 윤소진은 사이렌 소리에 대해서는 초연했다: “사이렌 소리는 정말 어쩔 없고 우리가 컨트롤할 수도 없으니 앞으로도 기대하지 말고, 적어도 미장 플레이스 바깥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마음에 걸리니 다시 갈까요.” 하긴 어쩔 없는 것에 마음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풍날 비가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두 연주했고, 다행히도 소음은 이상 없었다.

다양한 장비가 함께 자리했던 윤소진의 녹음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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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가 직접 개입해서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직접 편집한 영상은 단순히 연주를 촬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곡가들이 연주에서보고 싶었던장면들을 시각적으로 실현해내는 것에 가까울까? 작곡가가 촬영에 직접 개입하는 장면을 보니 작곡가가 연주에서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촬영은 여러 종류의 교훈을 남긴 성황리에 끝났다. 1 4.

피아니스트 유미 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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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어제의 촬영 탓에 모두 뻗었다. 하루 종일 쉬다가 조쉬 페리와 작곡가 김성애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쉬었다.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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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송회

여전히 모두가 피로했지만 다음날 문석민이 먼저 서울로 떠나는 탓에, 가볍게 환송회 저녁식사를 했다. 마지막 날인 만큼 밖에서 뭔가를 먹고 마셨다. 함께 모여 한참 얘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새로운 프로젝트가 화두에 오르고, 윤소진은 빠르게 기획안을 짠다. 새로운 소재가 등장할 때마다 곧장 그에 적합한 프로젝트 계획이 수립되고 마는데, 혹시 몇년치 계획안이 준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체로 1. 윤소진은 일을 확장하고, 2. 문석민은 좋은데 천천히 하자고 하고, 3. 나는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는 의견 충돌이 있기 마련이고 가끔 날이 말도 오가는 데다 싸움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무서울 때도 많지만, 어쩐지 대화는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보십시다. 재밌을 같은데요.” “ 말이 바로 말이에요.” 환송회를 끝으로 우리의 18일간의 레지던시는 마무리됐고, 여기서 차곡차곡 쌓은 동지애와 새로운 프로젝트 계획들을 바탕으로 올해를 꾸려나가기로 했다. 1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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