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싯 그룹과 미디어 아트가 당면한 침묵의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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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싯 그룹과 미디어 아트가 당면한 침묵의 문제들

 

침묵하고 침묵하며 침묵하라. 미디어 아티스트 태싯 그룹이 선택한 이름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에서 세 번의 침묵을 지시하던 ‘tacet’의 영어 표현인 ‘tacit’이다. 알고리즘에 기반한 오디오-비주얼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는 태싯 그룹은 작품에서 게임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자신들이 사용하는 창작의 방법론 그 자체를 작업의 소재로 삼고,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채팅으로 음악을 만들고, 소리가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하며, 때로는 기존의 음악을 재해석한다. 2018년까지 10년간 이러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태싯의 작업에 대해 게임도 예술이 됐다거나 한글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등 예술의 경계가 확장됐다는 종류의 표현이나, ‘눈으로 듣는’, ‘귀로 보는’처럼 시청각을 교차시키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단 하나의 영역이나 단 하나의 감각으로만 작업을 꾸려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작업의 영역이 넓은 만큼 태싯에 관심을 보이는 분야도 비단 음악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간 태싯이 음악 분야의 공연장뿐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두산아트센터 등 미술계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해왔다는 점은 이를 분명히 증명한다. 그런가 하면 한 게임 제작자는 태싯 그룹의 작업에 오랜 시간 흥미를 가져오기도 했다. 프로그래머가 태싯 그룹의 알고리즘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태싯이 구축해놓은 이 연결망은 꽤 멀리까지 뻗쳐있고 그 인지도와 영향력도 결코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어째서 태싯에 관해 “아무도 아무 얘기를 안 한다”는 침묵의 문제가 발견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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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구조의 문제도 깊게 개입되어 있다. “예술계에서 작품이 사고 팔리고 하는 이 모든 유통구조, 태싯의 작업은 그 구조에 끼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단 하나의 장르로 분류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물론 이들의 작업이 위치한 ‘미디어 아트’라는 명백한 영역이 존재하지만 이를 지금 당장 독립적인 제도나 장르라 보기는 어렵고, 태싯의 작업에는 알고리즘과 디지털 미디어, 인터랙티브, 그리고 음악과 영상과 게임, 즉흥적인 퍼포먼스 등 여러 요소가 교차한다. 이 경계의 문제는 자연스레 비평의 어려움을 낳는다. 비평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들의 활동을 꾸준히 살펴보며 피드백을 선사할 지면이 드문 데다 이들의 작품을 어떤 제도의 입장에서 서술할지 결정하는 일도 꽤 까다롭기 때문이다. 여러 장르에 걸쳐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음악계와 미술계다. 세부 장르를 막론하고 음악계는 대체로 미디어 아트에 대해 침묵하고, 미술계는 미디어 아트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만 태싯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음악의 방식으로 시간을 다루는 것에 오랫동안 훈련된 이들이 만드는 즉흥 퍼포먼스인 탓에, 이들의 작업을 미술의 방식으로만 독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음악계와 미술계가 각자의 입장에서 태싯에 관한 입장을 개진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으나 아쉽게도 매번 활발한 피드백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한편 이들의 작품으로부터 우리는 분명 전례 없이 완성도 높은 미디어 아트를 경험하고 있으며, 여러 장르를 종횡무진 오가는 유쾌한 퍼포먼스를 보고 있기도 하며, 동시대적 감각을 느끼며, 새롭고 신선함을 느끼는 동시에 디지털적 시청각 경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탓에 때로는 친숙함을 느끼기도 한다. 태싯 또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저희에게 굉장히 중요한 컨텍스트는 컴퓨터 안에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뭔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에요. 다들 어느 정도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전자음에 익숙하니까 관객마다 편차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이 자동으로 되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직관적으로 만들었어요.”  작품의 내부는 꽤 복잡한 시스템으로 짜여있지만 “직접 경험할 수 있게 시스템을 열심히 설계”한다거나 “좀 어렴풋하지만 뭔가 느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거나, “머리로 만들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태싯의 작품들은 이들이 무엇을 왜 하느냐는 의구심을 품을 새도 없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시청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그들이 목표한 바처럼 작품을 보고 듣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더 왈가왈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기도 하는 이 작품들로부터, 어렴풋한 의문을 어떻게 잡아채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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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싯 뿐 아니라 디지털이라는 환경에 주목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시청각적 질서를 꾸리길 바라는 아티스트들은 계속해서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를 살펴보고, 사운드 자체의 물성을 탐구하고, 디지털에서만 구현 가능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작업의 완성 형태는 아티스트에 따라 사뭇 다르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공연’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미디어 아트에 보다 주목할 수 있는 독립적인 무대를 형성해가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에 매료되는 이들은 점차 늘어나는 것 같고 많은 관객이 이러한 작업을 재밌다고 느끼는 것 같지만, 여전히 제도나 장르 자체에 대한 흥미를 넘어서는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나 이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관심이나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마도 태싯이 형성해온 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작품을 만드는 지나 작품이 무얼 말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해왔던 것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아티스트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제도 또한 점차 규모가 커지며, 작품들은 쌓여가고, 아주 많지는 않지만 소수의 관객들은 꾸준히 그곳을 찾는다. 현장의 변화는 긍정적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들의 작업을 둘러싼 이 침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제까지 태싯 그룹의 활동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그들의 작업에 별다른 문제도, 문제를 제기하는 이도 없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음악을 듣고 경험하거나 공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들에게 문제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 결국 더 흥미로운 경험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태싯에게도 필요한 것이라 믿는다면,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이들에게 어떤 물음을 던져야만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침묵 속에는 우리가 말하지 않고 지나쳤던 숱한 감각들이 잠재되어 있다. 태싯과 미디어 아트가 형성해놓은 넓은 틀 안에서, 우리가 꺼내지 못할 말이란 없다.

 

전문: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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