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이라는 낡은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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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이라는 낡은 올가미

 

우리는 대체 뭘 꿈꿨던 걸까. 이를테면 어떤 현대음악 작곡가의 신작 소식이 SNS에서 엄청나게 회자되고, 지인이 아닌 청중들이 객석을 가득 메우고,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음악에 관한 열띤 토론이 오가고,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에 현대음악으로 분류될 법한 음악이 한두 곡씩은 꼭 들어있고, 매년 주목할 만한 신인 작곡가가 꼬박꼬박 나오고, 언제나 현대음악을 들을 수 있는 믿을 만한 거점 공간이 도시마다 한두 곳은 있으며, 진심으로 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공연장에 찾아와 작곡가와 연주자를 후원하고 음악에 마음 깊은 찬사를 보내는, 그런 아름다운 미래?

물론 이 근사한 미래는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콧노래로 부르고 다닐 거라는 쇤베르크의 실패한 예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국 현대음악계의 현실은 이와 사뭇 다르다. 올해로 마무리될 ‘아르스 노바’ 같은 대형 공연이나 매년 열리는 여러 페스티벌에 가면 나름의 활기를 느낄 수 있고 얼마간 미래도 기약하게 되지만, 이런 에너지가 현대음악계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니고 이런 큰 연례행사들만으로 음악계가 지탱되는 것도 아니다.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현장들은 늘 크고 작은 난관에 부딪힌다. 기획과 연주는 나름 훌륭했으나 홍보에 실패해 청중을 모으지 못하거나, 연주가 미흡해 아쉽게 마무리되거나, 애초에 기획이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한편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하는 음악들로 가득하나 지원금만큼은 매번 기막히게 잘 타내서 그럴싸한 명맥을 이어가는 공연도 적지 않다. 일회적 실패라기보다는 이것이 바로 이제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지는 그런 공연들. 이 소박한 현대음악계는 딱히 호황은 아니고 늘 작은 위태로움을 품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크고 작은 공연들과 함께 별다른 큰일 없이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의 징후들

그런데 현대음악이 꿈꾸던 장면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이 제도를 유지하는 기반이 조금씩 침식되어가고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현대음악계를 유지해온 주체는 청중이나 연주자가 아닌 작곡가였다. 그리고 최근 젊은 현대음악 작곡가, 혹은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이들은 일찌감치 다른 길을 모색한다. 요즘은 학생이 없다거나 작곡과에 들어온 학생들이 다들 현대음악을 기피한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미 현대음악계에 들어온 이들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 활동을 막 시작해야 할 청년 작곡가들이 설 자리는 턱없이 모자란 데다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고, 중년 작곡가층의 창작이 대단히 활발해 보이지도 않는다. 어쩐지 폐허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음악들이 스멀스멀 늘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까지나 말뿐일 것 같았던 현대음악의 죽음이 이제는 정말 코앞에 다가오기라도 한 걸까.

이 죽음의 징후와 불안감만큼은 분명히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지만 지금 당장 사망선고를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작곡가들, 음악들, 공연들이 있고, 이 음악계를 지탱하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징후들을 그저 평소처럼 지나쳐버려서도, 현장이 생생히 살아있으니 현대음악의 죽음은 사실이 아닐 거라고 가벼이 속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그저 앉아서 현대음악에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기보다는 이 지긋지긋한 죽음 논쟁으로부터 유용한 것을 취해보자. 어쩌면 우리는 현대음악의 죽음을 시뮬레이션해본 뒤 그 사인(死因)을 미리 찾아내어 죽음을 예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 미래의 어느 한 순간이 아닌 바로 지금, 현대음악이 마침내 죽었다.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음악의 사인

여기 용의 선상에 오른 유력한 후보들이 있다. 첫째, 애초에 이때쯤 끝날 운명이었다. 둘째, 마침내 모든 청중이 등을 돌렸다. 셋째, 작곡가마저 현대음악을 떠났다. 넷째, 이 음악 분야의 자원이 고갈되어서 창작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다섯째, 현대음악이 추구하던 가치가 무효해졌다. 이들은 분명 모두 쟁쟁한 후보고 이 죽음에 어느 정도의 책임을 공유하겠지만,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조금 더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음악이 지금쯤 죽을 운명이었다는 말은 그저 죽음을 수사하는 게으른 표현일 뿐이며, 호황이었던 적은 없지만 소수의 청중은 언제나 남아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소수의 작곡가들은 현대음악 작곡을 멈추지 않았다. 이 분야의 자원이 고갈되었는가? 현대음악이 서양 고전음악에서 이어진 만큼 주로 사용하는 악기도 유지되었고 수많은 작곡가들은 고정된 악기들의 가능성을 꾸준히 확장해왔다. 이 오래된 악기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낯선 소리가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악기들이 탄생했고, 음악가들은 컴퓨터라는 훌륭한 기계도 손에 넣었다. 이 역시 완벽한 답은 아니다.

혹시 현대음악이 추구하던 가치가 무효해졌나? 현대음악의 역사는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몇몇 변곡점을 맞이했고, 시대마다 추구하던 가치도 함께 변화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의 시작점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주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음악의 이름이 지칭하는 바인 ‘현대성’이다. 이 거대한 가치는 그게 대체 무엇인지 매 순간 판명되지는 않았으나 이는 현대음악에서 끝없이 추구되어왔고, 때로 ‘새로움’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를 지향한다는 태도만으로도 창작자들 사이에는 끈끈한 전우애가 형성됐다. 그런데 이 가치는 비단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타 음악 장르, 나아가 많은 예술 분야가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목표다. ‘현대성’ 그 자체가 문제라면 타 예술도 모두 죽어 마땅할 것이므로 이 역시 현대음악의 직접적인 사인으로부터는 비껴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늘 의심받아왔던 이런 가시적인 요인들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현대음악의 조건 자체에 쉽사리 풀 수 없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던가 하는 식의 문제 말이다.

 

(후략)

전문: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2호
https://blog.naver.com/ozak_korea/22121740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