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경험을 선사하는 오늘의 작곡가, 에릭 휘태커

여전히 ‘현대음악’이라 불리는 음악들이 청중과의 만남을 고민하는 때지만, 종종 이와 무관한 사례가 등장한다. 합창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 작곡가 에릭 휘태커(Eric Whitacre, 1970-)의 음악은 바로 그 정확한 예다. 화성과 합창에 대한 예리한 감각을 보여주는 그의 음악은 호소력 있으면서도 듣기에 편안하고, 풍성한 감각을 선사한다. 현대음악이 마주한 큰 편견 중 하나인 불협화음도 휘태커의 곡에선 매력적인 긴장감을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휘태커의 음악은 낭만음악이 피안의 세계를 상상하게 했던 것처럼 그 작품 속의 세계에 금세 취하게 한다. ‘현대음악’이 맞닥뜨렸던 문제점들이 ‘이해’의 차원에 있었다면, 휘태커의 음악은 이를 넘어 ‘경험’의 차원으로 감상자들을 이끈다.

작품을 보자. 합창곡 <Cloudburst>는 휘태커가 숲 속에서 소나기를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두 부분으로 나뉘는 이 곡의 전반부는 소나기에 대한 일종의 찬가지만, 후반부는 소나기가 내리는 숲의 사운드스케이프 그 자체를 그려낸다. 그의 경험을 재현한 듯한 이 곡은 감상자에게도 그 감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다른 작품들도 유사하다. <Sleep>은 마치 꿈속의 세계로, <Seal Lullaby>는 판타지 영화에 나올법한 가상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작품들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다른 공간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다.

휘태커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합창단에서 시작되었다. 휘태커는 록스타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록스타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없었고, 대신 우연한 기회로 시작했던 합창단에서 “무채색으로 보이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이고, 자신보다 큰 어떤 것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진지하게 음악을 공부해 줄리어드에 입학했고,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비교적 늦게 음악에 뛰어들었음에도 그의 음악은 큰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합창단이 그의 작품을 노래했고, 2012년에는 음반 <Light&Gold>가 그래미 합창부문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매달 그와 관련된 행사가 2-3회 이상 꾸준히 열리는 것을 보면, 휘태커는 어느 정도 성공적인 작곡가의 삶을 사는 듯하다.

인터넷으로 함께하는 가상합창단(Virtual Choir)

휘태커가 이토록 큰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가상합창단 프로젝트. 휘태커가 악보를 웹상에 배포한 후 지휘하는 동영상을 올리면, 이에 맞춰 지원자들이 노래를 녹음한 뒤 웹에 올린다. 그럼 얼마 후 참가자들의 녹음 영상이 한데 모이고, 합창곡이 완성된다. 참여에 특별한 제약은 없다. 2008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두 차례나 TED에서 소개되었고, 참가자 수는 점점 늘어 가장 최근이었던 4회 때는 무려 5,905명이 참가했다.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합창.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함께 모였을 때만큼의 균일한 음향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집이 아주 섬세해야 했고, 필요한 경우 음악이 바뀌어야 했다. 휘태커가 TED에서 선보였던 ‘라이브’ 가상합창단에서는 실시간 데이터 전송에 걸리는 시차까지 고려해 서로 노래하는 시간이 조금씩 달라도 음악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편곡하기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가상’의 스크린이 거둬지고, 기술의 제약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무대에서 음악만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같을까. 결국 음악으로 귀결된다. 가상합창단 프로젝트는 음악을 바꿔서라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해보는 것이지,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의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미디나 가상악기가 아닌 가상합창단 프로젝트를 만든 그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를 경이롭게 느낀다. 그는 가상합창단을 통해 단원들이 결국 인터넷 너머의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았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가상합창단이든 실제 합창단이든, 그 너머엔 음악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터넷으로 함께 합주하는 WETUBE 프로젝트가 기획자 김신중에 의해 진행된 바 있다. 인터넷이 모두에게 열려있는 만큼 확장성도 크지만 프로젝트 자체의 고유성이 약해지기도 쉽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많은 작품을 창작하고 다양한 협업을 통해 프로젝트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음악도, 프로젝트도, 기술도, 세계도 빠르게 변화하는 중이다. 아직은 평가를 유보해야 하지만, 우선 휘태커가 인터넷이라는 그만의 특별한 현대성을 찾아낸 보기 드문 작곡가인 것은 분명하다. 에릭 휘태커가 앞으로 어떤 것들을 만들어낼지 인터넷에서도, 현실에서도 계속 지켜보자.

예술의전당 월간지 Beautiful Life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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