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본들의 세계

2._Stèle_portant_l’inscription_de_Seikilos

 

 

고대의 악보들은 오래된 사원의 벽과 묘지의 비석에서 발견되었다. 진흙과 돌에 새겨져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 악보들은 이것이 악보라는 사실만 가까스로 알려주었을 뿐 이것을 고스란히 소리로 되살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누군가가 악보를 해독해내 기호들을 소리로 바꾸기도 했지만 그 결과가 실제 고대의 음악과 얼마나 비슷한지 검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재현의 영역에서 이 악보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가장 오래된 악보라 불리는 <세이킬로스의 비문>은 악보와 음악의 관계가 애초에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알려준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누군가 소리들을 부호화해 기록한 이유는 아마도 그 아름다운 노래를 어떻게든 다시 듣고 싶어서였겠으나, 악보가 음악의 완벽한 재현을 담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악보가 애초에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음악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눈에 보이는 문서로 번역한다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록과 원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공유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록은 사라짐에 대비하는 것이고 무언가가 기록되는 순간 그건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원본과 영원히 같아질 수 없는 데다가 원본이 사물로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 기록이 원본을 장악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악보에 적힌 기호 더미가 악보 이전의 음악에 상응하는지 대체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그 원본의 존재 여부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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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도(fidelity)라는 말은 녹음과 그 원본이 얼마나 가까우냐를 측정하는 일종의 가늠자다. 녹음이 굉장히 잘 되어 있다면 그 녹음은 원본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고충실도(high-fidelity) 혹은 하이-파이(hi-fi)라, 녹음 과정에서 잡음이 많이 끼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낸다면 저충실도(low-fidelity) 혹은 로-파이(lo-fi)라 불린다. 어떤 녹음이 하이-파이냐 로우-파이냐라는 판단은 디지털이 들려주는 깨끗한 소리에 익숙해져 ‘음반 매체의 노이즈’가 무엇인지 분명히 체득한 우리에게 꽤나 손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 ‘하이’하거나 ‘로’한 것이 대체 어디에 충실한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다. 녹음은 라이브를 기록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기록만’ 했던 시기는 거의 찰나에 불과했고 사람들은 이 기술을 현실의 소리를 잘 기록하기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일찍이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여러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부분들을 자르고 재조합해 음반을 만들었고, 테오도어 그래칙이 지목했듯 비틀즈는 [Sgt. Pepper]에서 닭 울음소리를 기타 음으로 바꾸는 불가능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녹음이 들려주는 것은 생생한 기록보다는 이 세계에서 한 번도 발생한 적이 없는 가상의 사건에 가까웠다.

심지어 녹음은 실제 라이브 현장을 재구성하기까지 했다. 초기 녹음에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소리만 들어야 하는 녹음의 특성을 고려해 더 극적인 비브라토를 해댔고, 실제 연주에서 제거할 수 없는 페달을 밟는 소음이나 악보를 넘기는 소리, 연주자의 숨소리 같은 사소한 잡음들은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녹음 스튜디오에서 은밀하게 규제된다. 이 세계에서 열리는 공연의 횟수보다 음반의 개수가 많아진 이래로 연주는 ‘음반처럼 깨끗하고 완벽한’ 수준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녹음이 일종의 원본 형식처럼 자리하는 몇몇 장르의 경우 음악가들은 자신이 만들었던 그 소리를 공연장에서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세계의 귀들이 이미 녹음이라는 형태에 깊게 익숙해진 탓이다.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어, 이제 공연은 녹음이라는 원본에 충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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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의 관건은 소리를 얼마나 잘 잡아내느냐지만 여기서 쉽게 간과되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녹음기술은 인간의 귀를 본떠 만들어진 데다 인간의 귀와 더더욱 같아지려고 노력해왔으므로 어떤 녹음이 생생하다거나 진짜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대상이 정말 객관적으로 같다기보다는 ‘우리의 귀가 들었던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충실도 논리의 이면에는 그 동일성을 감지해내는 인간의 귀가 놓여있다. 여전히 누군가 녹음의 원본이 라이브라고 주장한다면 여기서의 원본은 단순히 ‘생생한 라이브’가 아니라 ‘우리의 귀가 들었던 생생한 라이브’인 것이다.

사진과 음악은 거의 모든 차원에서 서로 어긋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지속적인 시간에 의지하는 것과 찰나에 의지하는 것. 이 두 영역에서 어떤 친연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진을 포섭하려는 기술과 음악을 포섭하려는 기술의 기준점 중 하나가 인간의 신체였다는 점이다. 이미 인간의 귀와 눈은 녹음기술과 카메라 기술에 역전되었지만, 귀를 따라잡으려 애쓴 녹음처럼 카메라 역시 눈의 원리와 일정부분을 공유하며 인간의 눈이 보는 수준까지 상을 잡아내려 노력했다. 최고의 녹음기와 최고의 카메라가 들려주고 보여주려 한 것이 우리의 귀와 눈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면, 이 기록 기술들의 아주 오래된 원본은 인간의 신체였을까?

 

(후략)

전문: 서울사진축제 “walking, jumping, speaking, writing. 境界を、ソウルを、世界を、次元を.
경계를, 시간을, 세계를, 차원을. 신체는, 링크는, 언어는, 형태는.” 전시 도록(더북소사이어티, 이라선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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